양원(良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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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때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종3품의 세자 후궁.

개설

조선시대에 세자의 후궁은 내명부에 속했으며 내관으로 불렸다. 또한 세자궁에 소속된 궁녀와 합쳐 여관(女官)으로 불렸다. 이는 여성으로 이루어진 세자의 후궁과 궁녀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양반 관료 즉 남관(男官)에 대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내명부에 소속된 세자 후궁은 비록 내관 또는 여관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는 세자의 첩이었다. 갑오개혁 때 내명부가 외명부와 통합되어 명부사(命婦司)로 바뀌면서 세자의 후궁 역시 명부사에 소속되었다. 대한제국 때에 명부사는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이때 세자의 후궁 제도도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 건국부터 세종대 이전까지는 다분히 고려시대의 관행이 유지되어 왕과 세자의 후궁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다. 후궁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무질서하게 후궁을 뽑아 들이자 양반 관료들은 후궁 제도를 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은 태조대부터 시작되어 태종대를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먼저 1428년(세종 10)에 왕의 후궁 제도를 정비하였고(『세종실록』 10년 3월 8일), 뒤이어 1430년(세종 12)에 이르러 당나라의 태자 내관 제도를 참조한 세자의 후궁 제도를 마련하였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당나라의 태자 내관에는 정3품의 양제(良娣) 2명, 정4품의 양원(良媛) 6명, 정5품의 승휘(承徽) 10명, 정7품의 소훈(昭訓) 16명, 정9품의 봉의(奉儀) 24명으로 5종류가 있었다. 한나라 때의 태자 내관에는 양제와 유자(孺子) 2가지만 있었다. 송나라 때 보림(寶林)과 양제로 바뀌었다가 수나라 초기에 양제·양원·승휘·소훈·봉의 5가지의 태자 내관을 두었고, 이것이 당나라의 태자 내관으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1430년의 세자 후궁 제도에서는 정2품의 양제, 정3품의 양원, 정4품의 승휘, 정5품의 소훈으로만 규정되어(『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당나라의 태자 내관에 비해 종류는 1가지가 준 반면 품계는 오히려 상승했다.

조선의 세자 후궁 중에서 양원은 정3품이고 정원이 규정되지 않은 데 비해, 당나라의 경우 양원은 정4품이고 6명이었다. 이는 조선의 양원을 당나라의 양원에 비해 1품 높게 정비한 것이다. 아울러 신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정원은 규정하지 않았다.

세종대에 마련된 세자 후궁 제도는 정품(正品)이 종품(從品)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림으로써 조선시대 세자 후궁 제도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내명부는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해 명부사로 바뀌어 궁내부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1년 7월 18일). 명부사는 기존의 내명부와 외명부가 통합된 것이다. 하지만 명부사는 대한제국 때에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910년(순종 3)에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는데(『순종실록부록』 3년 12월 30일), 이왕직에는 서무계·회계계·장시계(掌侍係)·장사계(掌祀係)·장원계(掌苑係)의 5개 계가 설치되었다. 이때 내명부의 일부 궁녀만 장시계에 소속되고, 그 밖의 내명부 후궁과 외명부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당육전(唐六典)』
  • 김선곤, 「이조초기 妃嬪考」, 『역사학보』 21, 1963.
  • 이영숙, 「조선초기 內命婦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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