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보(梁山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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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3년(연산군 9)∼1557년(명종 12) = 55세].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언진(彦鎭)이고, 호는 소쇄옹(瀟洒翁)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담양(潭陽)이다. 아버지는 양사원(梁泗源)이고,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는 송복천(宋福川)의 딸이다. 우참찬(右參贊)송순(宋純)의 종제(從弟)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고,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교우 관계였으며, 김인후(金麟厚)는 그의 집우(執友)였다.

중종~명종 때의 활동

1519년(중종 14)에 중종(中宗)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친히 유사(儒士)들을 시험하였는데 양산보(梁山甫)가 나이 17세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대관(臺官)이 뽑은 자가 많다고 하여 삭제하도록 주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고 불러다가 위로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는데, 양산보의 스승 조광조가 화수(禍首)로 몰리게 되자 양산보가 통분(痛憤)해 하며 그날로 남쪽으로 돌아왔다. 살고 있는 곳이 우아하게 수석(水石)의 경치가 좋았으므로, 그 가운데다 집을 짓고 이름을 ‘소쇄원(瀟洒園)’이라 하고 자호(自號)를 ‘소쇄옹’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은둔 생활을 하며 의(義)를 행하면서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다.[『남계집(南溪集)』 권73 「처사소쇄옹양공묘갈명(處士瀟洒翁梁公墓碣銘)」 이하 「양산보 묘갈명」]

중종 말엽에 중앙과 지방에 전교를 내려 유일지사(遺逸之士)를 모두 추천하라고 하였다. 이에 창평현령(昌平縣令)이수(李洙)가 평소 양산보를 공경하였던 터라 그 명에 응하려고 하였으나 양산보가 극력으로 사양하여 추천하지 못하였다. 1552년(명종 7)에 다시 추천자 명단에 올랐으나 공이 끝내 나아갈 뜻이 없었다. 1557년(명종 12) 3월 20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55세였다.[「양산보 묘갈명」]

성품과 일화

양산보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성격이 기이하고 뛰어났으며 단정하고 엄숙하였다. 효성과 우애는 하늘이 내린 듯했으며, 행동이 바르고 사람 됨됨이가 청렴결백하며 고결하였다. 정신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했으며, 스스로를 잘 다스렸다.[『여지도서(輿地圖書)』]

한편 양산보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기우(器宇)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아 대의(大義)를 깨달았으므로, 아버지 양사원이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서울에 들어가 조광조가 올바른 학문으로 후진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청원하여 학문을 배웠다. 조광조가 곧바로 『소학(小學)』의 글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것을 따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양산보가 잘 지키며 잊지 않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조광조가 매우 칭찬하였다.[「양산보 묘갈명」]

양산보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몸을 수양하는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고, 사물에 이르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으로 마음을 수습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본심을 보존하고 기르며 글의 깊은 뜻을 완미하고 사색하며 번갈아 그 공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조광조에게서 얻은 바이다. 그리고 평생에 힘을 기울인 것은 오로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었으며, “군자(君子)의 학문은 저절로 근본과 여줄가리가 있는데, 근본이 이미 뜻을 이룰 수 없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하겠는가?” 하면서 저술을 하지 않았다.[「양산보 묘갈명」]

그러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예절에 지나치게 하여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다. 일찍이 나무꾼의 실화로 불길이 선산(先山)에 미치자 공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달려가 불을 끄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다.”고 말하였다. 어려서 과부가 된 고모에게서 양육을 받았는데 그 고모가 죽자 1년의 복(服)을 입었으며 또 심상(心喪)을 입어 보답하였다. 일찍이 효부(孝賦)를 지어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인륜과 친애(親愛)하는 도리를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읽는 자가 감동하였다.[「양산보 묘갈명」]

평소 사물을 접함에 일찍이 남에게 특이함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구차스럽지 아니하고 안정되어 조용하고 까다롭지 아니하며 고상하고 깨끗하며 엄격하고 정돈이 되었으며, 의복과 음식, 말과 행동은 비교적으로 절도에 맞았고 채우고 기르기를 이미 오래 하여 바라보면 의젓하게 덕이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양산보 묘갈명」]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양산보를 기렸는데, 조광조의 문하에서 함께 학문을 배웠던 성수침 형제는 양산보를 한 번 보고서 그전에 교유하던 사람같이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두려운 친구이다.” 하였으며, 김인후는 항상 형의 예(禮)로 섬기면서 양산보의 학문을 칭송하며 읊고 감탄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등도 양산보의 성품과 학문을 칭송하였다.[「양산보 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광주(光州) 이현(梨峴)의 선영에 있으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남계집』 권73 「처사소쇄옹양공묘갈명」] 그리고 이민서(李敏敍)가 지은 행장(行狀)과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이 남아 있다.[『서하집(西河集)』 권16 「소쇄원양공행장(瀟洒園梁公行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06 「소쇄원양공행장(瀟灑園梁公行狀)」]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호조 정랑(正郞)김후(金珝)의 딸로, 이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양자홍(梁子洪)은 먼저 죽었고, 차남 양자징(梁子澂)은 거창현감(居昌縣監)과 석성현감(石城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삼남은 양자정(梁子渟)이다. 딸은 노수란(盧秀蘭)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측실(側室)의 아들로 양자호(梁子湖)가 있었다.[『송자대전』 권206 「소쇄원양공행장」] 한편 차남 양자징은 김인후에게 글을 배우고 그의 사위가 되었는데, 훗날 학문과 효성을 인정받아 1786년(정조 10)에 김인후가 배향되어 있던 필암서원(筆巖書院)에 배향되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0년 2월 26일]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남계집(南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서하집(西河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포암집(圃巖集)』
  • 『면앙집(俛仰集)』
  • 『용호한록(龍湖閒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