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陽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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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그레고리력으로, 음력(陰曆)에 대칭한 명칭.

개설

음력과 달리 양력(陽曆)은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요일을 바탕으로 달 주기가 완전히 배제된 태양력을 의미한다. 양력은 서양의 그레고리력으로, 한국에서는 1896년(건양 1)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1876년(고종 13) 한일수호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더 이상 음력을 사용할 수 없는 현실을 조선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며, 이로써 조선은 중국 중심의 시간 질서에서 서양 중심의 시간 질서로 편입되었다.

내용 및 특징

양력은 음력에 대칭된 표현으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그레고리력)을 의미한다. 양력이 사용되기 이전, 조선시대에 사용된 역(曆)은 대통력(大統曆)과 시헌력(時憲曆)이었다. 이 역법들은 동양의 역법으로 음력으로 지칭되는 태음태양력이다. 대한제국기인 1896년에 역법은 완전한 서양력이라 할 수 있는 양력 즉 태양력으로 바뀌었는데, 200여 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되었던 시헌력이 개력된 것은 역법상의 문제가 아닌, 당시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조선은 1876년 한일수호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더 이상 시헌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중국 중심의 역법 질서가 서양 중심의 역법 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태양력 중심의 역법 질서는 본격적인 태양력의 시행에 앞서 재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가의 공식력으로서 외교문서에 기재하는 월·일에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88년(고종 25)부터 시작되었다. 1888년 8월에 조선은 일본과 ‘판리통련만국전보약정서(辦理通聯萬國電報約定書)’를 체결하면서 외교 문서에 양력을 사용할 것을 합의했다.

조선에서는 1888년부터 일본과의 합의에 따라 외교문서에 청의 연호를 없애고 개국 기원과 양력을 사용하였다(『고종실록』 25년 8월 18일). 그러나 양력은 외교문서에 국한된 것이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여전히 시헌력인 음력이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그 이듬해인 을미년 역서(曆書)부터 청의 연호가 아닌 개국 연호, 즉 개국 504년을 기원(紀元)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역서의 권두(卷頭) 명칭도 그동안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개국 연호를 딴 ‘대조선개국오백사년세차을미시헌서(大朝鮮開國五百四年歲次乙未時憲書)’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개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한 양력의 사용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음력인 시헌력은 1895년 11월 16일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895년 11월 17일부터에서 12월 30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1896년 1월 1일자로 공식력이 시헌력에서 태양력으로 변경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교문서에서는 이미 태양력이 사용되었으며, 『관보(官報)』에도 1895년 4월 1일부터 그 이전의 『조보(朝報)』 체재에서 완전히 벗어나 요일을 병기하는 등 서양의 요일을 일진(日辰) 대신 기입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보다 앞서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서양 및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던 양력과 요일 주기가 사용되면서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간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예컨대 1883년에 창간된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보면, 서양 선박의 운행에 관한 일요일, 즉 공휴일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개항과 함께 서양의 요일 주기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서양의 요일 주기는 양력으로의 개력에 앞서서 관청의 근무시간을 변화시켰다.

1896년 양력의 시행과 함께 당시 관청과 궁중에서는 모두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국가의 소식지인 『관보』가 양력으로 발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력이 선포되기 이전인 1895년 11월 3일에 이미 고종의 생일날을 음력 7월 27에서 양력 9월 8일로, 왕후의 생일을 정월 22일에서 양력 3월 6일자로 지내기로 하는 등 적극적으로 양력의 사용이 권장되었다(『고종실록』 32년 11월 3일).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96년 7월 24일에 음력으로 환원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양력의 사용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양력의 사용으로 한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시간 질서에서 벗어나 서구를 중심으로 한 시간 질서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양력의 시행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주도한 청(淸) 세력의 퇴색이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보다 앞서서 양력을 사용한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면도 있었다.

양력의 사용은 달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898년부터 사용한 명시력은 기존의 음력 체재에 양력이 첨가된 과도기적 역서로 음력 날짜 하단에 양력의 날짜와 요일을 병기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민력의 경우는 양력을 상단에 음력을 하단 넣었으며, 전통 역서의 길흉과 관련된 내용을 대폭 삭제하여 길흉일의 택일을 중요시하는 전통 음력에서 어느 정도 탈피한 체재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역서 체재의 변화는 날짜와 요일을 중요시하는 양력 사용과 함께 역서의 대중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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