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역(良洞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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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의 도로망인 성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양동역(良洞驛)은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수산신역(守山新驛)이라고 하였다. 그 뒤 세조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성현도(省峴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밀양도호부 편에는 수산신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조대에 양동역으로 개칭되기 전의 이름이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성현역(省峴驛)·용가역(龍駕驛)·수안역(水安驛) 등과 함께 경상도의 역도인 성현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밀양 편에 따르면, 양동역에는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7필 등 총 9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290명, 역노(驛奴) 2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57년(세조 3)에는 경상도의 역간 거리가 고르지 못한 것을 역의 이속(移屬)을 통해 조정해 역민들이 원활하게 교통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양동역은 용가역(龍駕驛)으로 이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4월 28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두게 하였다. 이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두루 살피기가 어려워지자 역로가 쇠퇴하는 등 각종 폐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양동역은 성현역·수안역·범어역(凡於驛) 등과 함께 성현도찰방의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한편 1467년(세조 13)에는 양동역 앞에 제방을 쌓고 둔전(屯田)을 만들기도 하였다. 양동역은 조선후기까지 성현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양동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 따르면 밀양도호부 관아 남쪽 35리 지점으로, 남쪽 무흘역(無訖驛)에서는 30리, 동쪽 금동역(金洞驛)에서는 15리 떨어져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수산현에 있으며, 밀양도호부에서 41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또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서쪽의 영산 온정역(溫井驛)과는 31리 106보, 동쪽의 김해 금곡역(金谷驛)과는 28리 235보, 남쪽의 김해 대산역(大山驛)과는 12리 13보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에 비해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밀양도호부 남쪽 41리 지점인 밀양군 하남면 양동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양동리 양동마을 일대이다. 양동마을은 양동역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지금도 역촌(驛村)이라고 불린다. 또 양동리 서당골과 소바우, 대사리 창동 앞에 있는 들을 ‘마구들’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양동역의 역마를 사육하면서 말을 방목하던 들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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