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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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4년(태조 3) ~ 1462년(세조 8) = 69세]. 조선 초기 태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적출 4남 4녀 중에서 제 1왕자. 봉작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고, 자는 후백(厚伯)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민제(閔霽)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 충녕대군(忠寧大君)이도(李*), 성녕대군(成寧大君)이종(李*)의 동복형이다. 태종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셋째 동생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라서 세종이 되었다.

태종~세조 시대 활동

1404년(태종 4) 나이 11세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418년(태종 18) 세자에서 폐출될 때까지 14년 동안 왕세자로 있었다. 1407년 7월 13일 김한로(金漢老)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15일에 세자빈 김씨는 숙빈(淑嬪)으로 봉하고, 그 아버지 김한로는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어머니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선경 택주(善慶宅主)로 삼았다.

양녕대군이제(李禔)는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는 풍류생활을 좋아해서 활쏘기와 사냥으로 오락을 일삼았다.(『세조실록』 세조 8년 9월 7일) 양녕대군은 왕세자로 있던, 1408년(태종 8) 명(明)나라에 다녀왔는데, 명나라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가 그를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를 알현하자, 영락제는 그를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후 양국간의 혼사는 성사되지 않았다.

후궁 문제로 인하여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사이가 나빠져서 태종이 원경왕후의 형제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내자, 세자 양녕대군은 어머니와 외삼촌을 감싸다가, 태종의 미움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세자의 여자 문제가 잇달아 터졌다. 우선, 1416년(태종 16) 구종수(具宗秀)와 이오방(李五方)이 세자에게 매와 여자를 바쳤다가 유배에 처해졌다. 이듬해 2월에는 어리(於里)와의 염문이 폭로되었다. 곽선(郭璇)이 첩이었던 어리와 간통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태종은 격노하였고, 세자의 개과천선 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1418년(태종18) 세자는 다시 어리를 불러 들였고, 임신까지 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반성의 글이 아닌 앞으로 부왕의 마음에 들게 노력하지 않겠다는 항명 성격을 띤 글을 올렸다.

이후 대신들의 폐세자 요청이 줄을 이으면서 1418년(태종 18) 왕세자에서 폐위되어 양녕대군으로 강봉되었다. 세자빈 김씨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강봉되었다. 셋째동생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해 8월 11일 즉위하여 세종이 되었다.

세자에서 폐출된 양녕대군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436년(세종 18) 과천(果川)에 양이(量移)되었다. 양이(量移)란 변방으로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하여 도성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세종 때 석방되어, 전국을 유람하였으며,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될 때 종실의 수장으로서 세조에게 조력하였다. 1462년(세조 8) 9월 7일 서울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69세였다.(『세조실록』 세조 8년 9월 7일「양녕대군 이제 졸기」]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崇禮門)경회루(慶會樓) 등의 현판을 썼다고 전해진다.

인품과 일화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공부하는 것보다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고, 자주 궁중을 빠져나와서 풍류생활을 즐겼다. 기생 어리를 사랑하다가, 막내동생 성녕대군의 상중에 아이를 낳는 바람에 아버지 태종의 분노를 샀다.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에는 아버지 태종의 뜻이 셋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일부러 왕세자의 자리를 사양하기 위해 풍류생활과 음란행위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 사람들은 양녕대군이 왕위를 싫어하여 8도를 방랑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세종이 이를 잘 수습하여 형제의 우의를 다하였다고 했다. 비록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폐출되어 왕위를 충녕대군이 이었으나, 양녕대군과 동생 세종과의 우의는 지극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끔 사저(私邸)에서 형 양녕대군을 불러서 서로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묘소는 현재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산 65-42에 있다. 사당 지덕사(至德祠)는 1675년(숙종 1) 양녕대군의 외손(外孫)인 우의정허목(許穆)의 주장에 따라 숙종이 숭례문 밖에 세우도록 하였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자 지덕사라 이름하고, 허목이 그 사적을 지어 걸었다. 지덕(至德)이라는 이름의 사호(祠號)는 『논어(論語)』의 “태백지덕(泰伯至德)”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제강압으로 1912년 1월에 사당을 현재 위치의 묘소 앞으로 옮기게 되었다.

부인인 양성부부인(陽城府夫人)은 광주 김씨(光州金氏)김한로의 딸인데,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숙빈으로 봉해졌으나 남편이 강봉될 때 삼한국대부인으로 함께 강봉되었다. 자녀는 3남 4녀를 낳았다. 1자는 순성군(順城君)이애(李*)이고, 2자는 함양군(咸陽君)이포(李*)이며, 3자는 서산군(瑞山君)이혜(李譓)이다. 대군의 딸은 현주에 봉하는데, 1녀 전의현주(全義縣主)는 이자(李孜)의 처이고, 2녀 현주(縣主)는 이번(李蕃)의 처이다. 3녀 영평현주(永平縣主)는 김철균(金哲勻)의 처이다. 4녀는 현주로 봉해지지 못했고, 박수종(朴壽宗)의 처가 되었다. 서출은 7남 11녀이다. 1자는 고정부정(古丁副正) 이겸(李謙)이고, 2자는 장평부정(長平副正) 이흔(李訢)이며, 3자는 계천부정(溪川副正) 이성(李誠)이다. 4자는 봉산부정(蓬山副正) 이순(李諄)이고, 5자는 안창부정(安昌副正) 이심(李諶)이며, 6자는 돌산부정(突山副正) 이광석(李廣石)이고, 7자는 금지부정(金地副正) 이광근(李廣根)이다. 1녀 이애중(李愛重)은 이종경(李宗慶)의 처가 되었고, 2녀는 김암(金巖)의 처, 3녀는 권치중(權致中)의 처, 4녀는 김승한(金承幹)의 처, 5녀는 김오(金澳)의 처이다. 6녀는 김원(金瑗)의 처, 7녀는 한치형(韓致亨)의 처, 8녀는 권덕영(權德榮)의 처, 9녀는 유석번(兪碩蕃)의 처, 10녀는 김의(金儀)의 처, 11녀는 임중(林重)의 처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춘정집(春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