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분원(楊根分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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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군에 자리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개설

양근분원(楊根分院)은 조선시대 양근군의 관할 안에서 도성의 본원(本院)인 사옹원이 관리했던 백자의 생산 시설이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와 궁궐의 음식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이므로 백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백자를 생산하기 편리한 곳에 따로 분원을 두고, 가마를 마련하여 필요한 그릇을 만들었다. 조선전기에는 사옹원의 분원을 경기도 광주목에 마련했으나 광주 지역의 땔감이 부족해짐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광주목 양근군의 시장(柴場)까지 함께 사용하였다. 양근분원은 광주목 양근군의 시장에 자리했던 사옹원의 분원을 지칭한다.

내용 및 특징

사옹원은 조선시대에 왕의 식사를 마련하고 궁궐의 음식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서이다. 그러므로 그릇을 많이 사용했다. 사옹원은 업무에 필요한 그릇을 조달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목과 광주목 양근군에 관요인 분원을 설치하여 백자의 생산을 전담하였다. 조선시대 관요는 1467년(세조 13)에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으로 확대 개편되고, 녹관(祿官)이 배치되어 제반 업무를 전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사옹원 관영 자기 공장은 단순히 사기소(沙器所) 혹은 자기소(磁器所)라고 지칭되었으나 1625년(인조 3) 무렵부터 분원으로 인식되었다.

사옹원의 분원은 주로 경기도 광주목과 양근군 관할 지역에 설치되었다. 백자의 제작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땔감이 필요했으므로 백자를 제작했던 가마는 주변에 수목이 울창한 곳을 따라 계속 옮겨졌다. 경기도 광주목과 양근군은 도성과 가깝고 땅이 넓고 수목이 무성했으므로 궁궐은 물론 도성의 여러 관서에 땔감을 공급했다. 왕족들 역시 이 지역에서 땔감을 구했다.

조선시대에는 관서별로 필요한 땔감의 채취를 위하여 일정한 구역을 지정하고 백성들이 그 안에 있는 삼림 자원을 무분별하게 벌채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러한 지역을 시장이라고 불렀다. 조선 정부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工典)」 시장조(柴場條)를 통해 관서별로 시장의 범위를 명문화했다. 땔나무를 사용하는 각 관서에는 수변(水邊)에 시장을 차등을 두고 마련해주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최초에 마련된 광주목의 수목은 점차 고갈되어 갔다. 그러므로 1493년(성종 24)에는 광주의 시장과 관련하여 관서 간에 분쟁이 야기될 만큼 땔감의 공급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정부는 궁궐과 도성의 여러 관서가 사용하는 시장을 광주목은 물론 인근의 양근군까지 확대했다. 양근군은 남한강 변에 자리하고 주변에 산이 많아 땔감의 확보가 수월했다.

조선시대 양근군은 광주목에 속했으며 당시 양근군의 범위는 남한강 이남 지역을 일부 포함했다.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북쪽에 해당하는 남종면(南終面)은 본래 양근군의 남쪽 끝에 해당했으나 일제강점기에 광주로 편입되었다. 그러므로 광주의 최북단에 자리한 지역의 이름이 남종면이다.

양근군은 1908년(융희 2)에 반포된 칙령에 따라 지평군(砥平郡)과 합쳐져 양평군이 되었으며, 옛 양근군은 오늘날 양평군의 서쪽에 해당한다. 양근(楊根)은 고구려의 옛 지명으로 버드나무의 뿌리라는 뜻이다. 물가에 자리한 지역의 특징 때문에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는 모습을 담은 지명이다. 양근군의 범위는 『세종실록』「지리지」 광주목(廣州牧) 양근군조(楊根郡條)의 내용을 근거로 가늠해볼 수 있다. 양근군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지평(砥平)에 이르기까지 20리,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까지 35리, 남쪽으로 천녕(川寧)에 이르기까지 17리, 북쪽으로 가평(加平)에 이르기까지 40리이다. 동쪽 경계에는 용문산(龍門山)이 자리한다.

양근군은 산이 높고 험하여 일찍 추워졌으며, 지형의 대부분이 산지이고 논은 전체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지역에 마련된 울창한 수목과 도성에 인접한 접근성으로 인하여 국초부터 왕실의 사냥터로도 활용되었다. 왕이 군사를 훈련하고 사냥을 겸하는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곳은 대부분 수목이 울창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 왕실이 사냥터로 활용한 경기도 광주, 양근, 포천 등지에는 조선전기에 백자를 제작했던 가마터들이 남아있다.

또한 양근군의 남쪽에는 남한강이 동서로 흐르고, 군의 북쪽과 서쪽은 북한강을 경계로 각각 가평과 양주로 나뉜다. 양근군을 경유하는 한강의 수운이 발달한 만큼 물류를 운송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1424년(세종 6) 무렵 양근군에는 사옹원의 분원 외에도 동전(銅錢)을 제작하기 위한 사섬서(司贍署)의 분서(分署)도 자리했다.

양근군은 백자의 제작에 필요한 땔감과 완성된 제품을 도성으로 조달할 물길이 발달했다. 1530년(중종 25)에는 사옹원의 백자를 생산하기 위한 백점토를 양근군에서 구할 정도로 원료도 구하기 편한 곳이었다(『중종실록』 25년 2월 5일).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조선후기에 사옹원의 분원을 양근군에 마련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의 사옹원은 서울의 다른 주요 관서와 달리 별도의 시장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옹원의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광주목의 삼림을 따라 계속 옮겨 다녔다. 그 과정에서 군기시(軍器寺)의 시장 안에 가마를 마련했다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분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는 1493년(성종 24)에 광주목의 고재(羔岾)·가잉읍산(加仍邑山)·목예산(木刈山)·여말동(余末洞)·무애산(無涯山)·도마현(都麻峴)의 6개 지역을 사옹원의 시장으로 정했다(『성종실록』 24년 5월 25일).

그러나 광주목의 시장만으로는 도성의 궁궐과 관서를 비롯하여 왕족들이 필요한 땔감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한양의 여러 관서가 점유한 시장은 광주를 넘어 양근군까지 확대되었다. 1675년(숙종 1)에는 양근군에 이미 군기시의 시장이 마련되었다(『숙종실록』 1년 3월 28일). 또한 1697년(숙종 23)에 작성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당시 사옹원이 백자의 제작을 위해 광주의 6개 면, 양근의 3개 면을 시장으로 확보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정확한 지명을 알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관요 가마들의 위치를 감안할 때 사옹원의 시장은 주로 남한강의 남쪽에 해당하는 광주목의 동부 지역과 양근군의 남쪽 부분에 자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718년(숙종 44)에는 사옹원이 백자를 제작하는 번소(燔所)를 양근군의 우천(牛川) 강가로 옮길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숙종실록』 44년 8월 19일). 우천 강변에 자리했던 사옹원의 분원 가마는 이후 1721년(경종 1)부터 1752년(영조 28)까지는 금사리에서 운영되었으며, 이후로는 현재 남종면의 분원리로 이동하였다. 사옹원의 분원은 오늘날 분원리에 정착한 다음에는 더 이상 가마를 옮기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기도박물관, 『경기도 광주관요 종합분석보고서』, 2008.
  •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京畿道 廣州 中央官窯』, 1998·2000.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강세윤, 「朝鮮 18世紀 後半 靑畵白瓷 硏究」,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윤효진, 「18世紀 前半 京畿道 廣州 金沙里 白磁 硏究」,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