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藥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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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초(焰硝)를 만들 흙을 채취하여 화약의 제조 및 관리를 하거나 화포(火砲)를 제작하여 전투 등에서 이를 발사하거나 화포 발사법을 가르치는 장인.

개설

화약장(火藥匠), 합약장(合藥匠), 약공(藥工)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초기에는 화포를 제조하고 발사하였으므로 화통장(火筒匠), 화포장(火砲匠)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약장(藥匠)은 약을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조선초기에 약장은 화약의 제조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녹급을 지급받았고 체아직을 받아서 생활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의 약장의 역할은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화약을 제조하는 일이었다.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염초를 만들 흙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취토장(取土匠)이나 혹은 약장이 하였다. 약장은 염초를 제조할 흙을 얻는다는 핑계로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거나 백성들을 임의로 사역하므로 백성들은 이들에게 뇌물을 주어 역사에서 빠지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7년 5월 9일). 이런 문제 때문에 1452년(문종 2)에는 약장이 염초 제작을 위해 설치한 지방의 도회소(都會所)에 파견되지 않고 지방에서 직접 염초를 제작하여 중앙에 바치도록 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문종실록』 2년 3월 8일). 약장은 군기감 화약고의 제약청(製藥廳)에서 화약을 만들었는데 재료와 혼합 비율은 국가적인 비밀이었다. 성종 때는 이 작업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약장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성종실록』 8년 12월 20일).

둘째로 약장은 궁중에서 화포를 발사하여 외국 사신을 겁주거나(『태종실록』 7년 12월 30일), 동짓날에 귀신을 쫓기 위해 불꽃놀이를 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0년 12월 26일). 또한 전염병을 막기 위해 화포를 발사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6년 5월 8일).

셋째로 외적이 침입할 때나 침입할 위험이 있는 지역에는 약장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화포의 발사, 화약의 관리 및 화포 발사법을 군사들에게 교습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13일).

넷째로 약장은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화재 진압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들은 화재가 발생하면 다른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군기감에 모여야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27일). 약장은 세종 때에는 국가에서 두 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봉족 2명을 받았으며 거관(去官)할 경우에는 양인이면 6품으로 천인이면 장원서(掌苑署)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성종 때에는 약장에 대우가 축소되어 식사 제공과 봉족이 없어졌으며 거관할 때 관직을 받는 경우도 없어졌다. 또한 다른 장인과 섞여 8품 체아직 2자리, 7품 체아직 1자리만 받도록 되어있어 약장 가운데에는 죽을 때까지 체아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약장이 제작하는 화포와 화약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이 아니므로 약장의 생활은 어려웠다. 이에 정부에서는 약장에게 보인(保人) 2명을 주고 체아직도 궁인(弓人), 시인(矢人)의 체아직 가운데 부사정(副司正) 2자리, 부사맹(副司猛) 2자리, 부사용(副司勇) 7자리 가운데 부사정 1자리, 부사맹 1자리, 부사용 2자리를 주었다(『성종실록』 8년 1월 29일). 성종 때까지는 각 포(浦)에 화포를 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약장이 파견되어 그 곳 군사들에게 화포에 화약을 넣는 법을 익히도록 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9년 7월 16일).

변천

고려말에 설치한 화통도감(火㷁都監)에서 약장은 화포와 화약의 제조를 주관했을 것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조선초기부터 왕의 적극적 관심으로 1432년(세종 14)에 이르면 약장들은 최무선(崔茂宣)의 아들인 최해산(崔海山)에게 배운 화약 제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서 최해산이 다른 직으로 옮기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세종실록』 14년 4월 22일).

1434년에 군기감 소속 장인들이 증원되었는데 이때 약장은 22명에서 10명이 증원되어 32명이 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런데 약장을 감독할 사람이 없어 병조(兵曹)에서는 사대부의 자제 가운데 무략이 있는 자 10명을 선발하여 겸군기(兼軍器)라고 하고 화포의 제조만을 전담해 관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6년 3월 16일). 또한 당시에 화약 제조에 종사하고 있는 약장이 24명, 거관한 자가 20명, 권지직장(權知直長) 20여 명이나 되어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거나 적에게 잡히면 그 기술이 외부로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약장 24명을 2개의 번으로 나누어 그 중에 1~2명을 선발하여 그들만이 화약을 배합하거나 무게를 달도록 하였다. 이들은 근무 연한이 완료되어도 급료 및 봉족을 받고 70세까지 근무를 하였다. 그 밖에 나머지 약장은 화포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화약 제조법의 비밀 유지를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였는데, 거관한 약장은 주기적으로 점검을 받았으며 언제든지 역에 응하여야 하였다. 또한 약장들은 삼남 지역에 내려가서 지역민들의 염초 제조를 감독하여 염초 제작법을 아는 사람을 최소화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7년 5월 21일), (『세종실록』 17년 11월 30일). 1436년에는 평안도, 함경도에 파견되는 화약장을 6개월마다 교대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8년 11월 8일). 그 후 약장을 변경 지역에 보내지 않기도 하였다가(『세종실록』 20년 6월 14일), 세조 때에 다시 약장을 국경에 파견하였다(『세조실록』 6년 윤11월 12일), (『세조실록』 13년 5월 24일), (『예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세조 때에 약장은 정원이 75명이며 한번에 25명이 근무하였으며, 체아직으로는 부전사(副典事) 1자리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성종 때에는 이전보다 약장의 수가 줄어서 정원이 180명 가운데 80명만이 근무하였으며 대우가 이전보다 못하였다. 이에 약장에 대한 처우 개선이 이루어졌다(『성종실록』 8년 1월 29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의 약장은 없어졌다. 이 시기가 되면 약장이 했던 일을 다른 장인들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포를 쏘는 기능도 내금위(內禁衛)의 군사가 약장보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약장의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까지 약장이 기록에 등장하기도 하나 그 이후 염초장(焰硝匠)이 그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채연석, 『조선초기 화기연구』, 일지사, 1981.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연구』, 일조각, 1994.
  • 김일환, 「조선 초기 군기감 무기제조의 변화추이」, 『학예지』 12,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5.
  • 박재광, 「15-16세기 조선의 화기발달」, 『학예지』 9,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2.
  • 박재광, 「여말 선초의 화약·화기 제조에 대한 일고찰」, 『학예지』 12,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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