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색흑(額色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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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초기 대신으로 활동한 어서허이([額色黑], esehei)의 한자 이름.

개설

어서허이는 만주 양백기인(鑲白旗人)으로 청의 대신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너연([訥殷], neyen)부 부차([富察], fuca)씨로 장백산 인근에 세거하였는데, 그의 조부인 망길도(莽吉圖)가 청 태조 연간 건주여진으로 귀부하였다. 어서허이는 몇 차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주로 문관으로 활동하였다. 숭덕 연간인 1638년 비서원(秘書院)의 학사(學士)로 발탁된 이후, 순치 연간에 형부(刑部) 계심랑(啓心郎), 국사원(國史院) 대학사(大學士),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 병부 상서(兵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청태종문황제실록』·『태조태 종성훈』·『자정요람』·『통감전서』를 편찬할 때 총재관(總裁官)이 되기도 하였다.

가계

어서허이는 장백산 일대에 세거하던 너연부의 부차씨 망길도(莽吉圖)의 아들인 망길록(莽吉祿) 첫째 아들이다. 아들 서서허이([塞色黑], sesehei)는 강희 연간에 병부·형부·예부의 상서를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어서허이는 청 태종천총(天聰) 연간(1635)에 바키란([霸奇蘭, 巴齊蘭], bakiran) 을 따라 흑룡강 일대로 출정하고, 1640년에는 예친왕(睿親王)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함께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는 등의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주로 문서와 행정에 능한 문관이었다. 1638년에는 비서원의 학사로 발탁되었고, 1648년에는 형부의 계심랑이 되어 문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어서허이는 형부 계심랑으로 있던 1650년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도르곤이 자신의 친모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로 올리고 태묘에 부향(祔享)한 사실을 알리는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들어오기도 하였다(『효종실록』 1년 10월 4일).

1652년 국사원의 대학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1등 아다하 하판([阿達哈哈番=輕車都尉], adaha hafan)의 세습직을 얻었다. 1657년 어서허이는 국사원 대학사의 직함으로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순치제의 칙서는 화약의 사사로운 매매와 관련한 죄를 범한 조선효종의 아우 이요(李㴭)에게 죄를 내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효종실록』 8년 3월 28일).

어서허이는 1659년에는 보화전의 대학사가 되어 『청태종문황제실록』· 『태조태종성훈』·『자정요람』·『통감전서』 등의 편찬할 때 총재관으로서 이를 주도하였다.

상훈 및 추모

어서허이는 강희제의 즉위 직후인 1661년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문각(文恪)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옹정 연간에 현량사(賢良祠)에 입사(入祀)되었다.

참고문헌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청사고(淸史稿)』
  •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
  •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 『내국사원당(內國史院檔)』
  • 『팔기통지(八旗通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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