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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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한국 주재 일본 관원들의 부인들이 주도해서 만든 부인단체.

개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활용하고자 만든 관변단체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3년경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의 영사 부인이 부산일본부인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북청사변에 동원되었던 일본군을 위문하고 군사 원호를 장려하였다. 일본에서는 1901년 2월 24일 부산일본부인회에 자극받아 애국부인회가 창립되었다. 부산일본부인회는 지속적으로 군사 원호활동을 하였으며 러일전쟁 참여 유족에게 조위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1905년 초에 일본 애국부인회의 권유에 따라 애국부인회 부산지부가 되었다. 부산일본부인회에 이어 한국에 창립된 부인회가 경성부인회이다. 경성부인회는 1897년에 창립되었다. 애국부인회는 부산과 동일하게 일본 외교관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이들은 빈곤하고 불우한 내지인, 즉 일본인을 돕고 군대의 위문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러일전쟁기에는 부상병을 위문하고 위로금을 전달했다. 경성부인회는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다. 1904년 황태자비가 3,000엔, 황귀비가 2,000엔을 기부하였다. 1905년에는 일본 애국부인회 경성위원부(京城委員部)가 발대되었다. 같은 해에 평양과 마산에 지부가 발대했으며, 10월 30일에는 한국 부인의 애국부인회 정회원 가입이 허가되었다. 1906년에는 통감부 직원의 주도하에 애국부인회 한국지부 설립 논의가 시작되었다. 1월 19일 한국지부가 창설되고, 11월 10일에는 발족식을 거행하였다. 이 행사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한국내부대신 부인 등 한일 양국의 귀부인이 다수 참석하였다. 발족식에 참가한 구성원들이 통감부 고위 관료의 부인이며 대한제국 고위 관료 및 귀족 부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발족식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부인회의 취지를 한일 부인연합의 단체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애국부인회는 한일 융화의 성격을 지닌 단체로 출발한 것이다. 또한 애국부인회 소속 일본 부인의 사명이 대한제국 부인들을 문명으로 선도하고 계몽하는 것에 있다는 것에서도 친일 관변단체였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조직 및 역할

1907년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讓位)한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일본군을 위해 애국부인회는 부상자 구호 및 위문을 하였다. 특히 일본 군대의 부상자 모두에게 당시로서는 큰돈인 1엔씩을 위로금으로 보냈다. 일종의 군사 구호단체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보인 시기였다. 이들은 한국 거주 일본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의병을 탄압하는 일본군에게 원호하는 것이 군인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또한 매국노로 지목되어 집이 전소된 이완용을 방문해서 위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보였다. 회원 수는 1910년 6,464명이었고 그 중 일본인이 5,941명, 한국인이 523명이었다.

변천

1907년 1월 15일 애국부인회 한국지부는 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로 개칭하였다. 11월 9일에는 한국위원본부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에는 순종비가 기본금을 하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에는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에서 총회를 개최하게 되어 특별히 3,000원(圓)을 내렸다(『순종실록부록』 4년 5월 26일). 1911년 2월 3일에는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 박용옥, 「한일 부인회의 조직배경과 활동」, 『한국학논총』, 1974.
  • 히로세 레이코, 「대한제국기 일본 애국부인회의 탄생」, 『여성과 역사』13, 2010.
  • 千野陽一, 『愛國國防運動婦人資料集』, 일본도서센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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