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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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8년(태종 18)~1453년(단종 1) = 36세]. 조선 전기 세종〜단종 때 활동한 왕자, 서화가. 세종의 제 3왕자. 봉작(封爵)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자는 청지(淸之)이고, 호는 낭우(琅玗),비해당(匪懈堂), 낭우거사(琅玗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영의정(領議政)청송심씨(靑松沈氏)심온(沈溫)의 딸이다. 문종(文宗), 세조(世祖)의 동생이고,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 평원대군(平原大君)이림(李琳),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의 형이다. 정소공주(貞昭公主)와 안맹담(安盟聃)의 처인 정의공주(貞懿公主)가 그의 누이이다.

세종 ~단종 시대 정치 활동

1418년(태종 1)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6월 16일 대광보국(大匡輔國)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1429년(세종 11)1월 20일 좌부대언(左副大言)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0년(세종 12) 5월 17일에 여러 대군(大君)들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대군들이 종학(宗學)에서 배우니 종친들이 잇따라 입학하였다. 1438년(세종 20) 함경도에 6진(鎭)을 개척하자, 이 중 4진의 경재소(京在所)를 도성에 설치하여 풍속을 살피게 하고 종친에게 주장하도록 하였는데, 진양 대군(晉陽大君: 세조) 이유는 경원(慶源)을, 안평 대군이용은 회령(會寧)을, 임영 대군이구는 경흥(慶興)을, 광평 대군이여는 종성(鍾城)을 주장하였다.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集賢殿)교리(校理)최항(崔恒)·부교리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강희안(姜希顔) 등이 의사청(議事廳)에서 언문(諺文)으로『운회(韻會』를 번역하였는데 안평대군이용이 그 일을 관장하였다.(『세종실록』세종 26년 2월 16일조 기사 참고.)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별세하자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안평대군은 훈구대신인 김종서·황보인(皇甫仁) 및 이현로(李賢老) 등과 제휴하여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고 측근을 요직에 배치했다. 그해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정권을 잡기 위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살해하였다. 김종서·황보인과 뜻을 같이 하였던 안평대군은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桐)으로 이배된 뒤 사사(賜死)되어 36년간의 짧은 생을 마쳤다.

조선 전기 제일의 서예가

안평대군은 시문(詩文)·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서풍은 고려 말에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랐으나 그 경지는 그를 능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당대의 서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거정(徐居正)은 안평대군의 글씨를 조맹부의 글씨보다 훌륭하다고 하며 더 높이 평가하였다.(『사가정집(四佳亭集)』 권3 「시류(詩類)」 참고.) 이렇듯 뛰어나 서풍을 지닌 안평대군은 당대에 서예가로서 으뜸으로 회자되어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칭찬하고(『동문선(東文選)』 권4) 그의 작품을 구해 가기도 하였다. 정조는 “우리나라의 명필(名筆)로는 안평대군을 제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3 「일득록(日得錄) 3 문학(文學)」 참고.) 김정희(金正喜)는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제일이다.”라고 했다.(『완당집(阮堂集)』 권6 「제발(題跋)」 참고.) 한편, 안평대군은 그림에도 능했기 때문에 당대 유명 화가, 화원과의 교류도 깊었다.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의 발문을 안평대군이 썼다.

안평대군은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마포 북쪽 기슭 남호(南湖) 곧 용산강(龍山江)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문사(文士)들과 시회(詩會)를 베풀고 서화(書畵), 박혁(博奕), 음악 등을 즐겼다. 계유정난 이전에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김종서·황보인를 위시하여 박팽년·성삼문(成三問)·신숙주·이개·최항등의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박연(朴堧)·안견(安堅) 등이 이곳에서 같이 풍류를 즐겼다.

저서로 『비해당집(匪懈堂集)』, 『팔가시선(八家詩選)』이 있으며 그의 필적이 다수 전한다. 「세종대왕 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현 세종대왕기념관 소장)와 「청천부원군 심온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등이 있다.그의 글씨를 본으로 주조한 동활자가 있었는데, 1450년(세종 32)에 주조한 경오자(庚午字)와 1452(문종 2)에 주조한 임진자(壬申字)가 그것이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세조가 집권하자 모두 없앴다.

묘소와 후손

1747년(영조 23)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호(復號)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안평대군의 태실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에 있다고 『선원계보』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아들 태실 18기가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국가지정 144호이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뒤 안평대군금성대군 등 자신에게 반대한 형제들의 태실과 태실비는 파헤쳐 태봉 아래로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731년(영조 7) 영조에 의해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6종영(宗英)을 차례로 배향(配享)할 때 모셔졌다. 6종영은 안평대군·금성대군이유와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이어(李*), 영풍군(永豊君)이천(李瑔), 중추원 판사이양(李穰)이다. 6종영들은 그 후사도 끊기고 묘소도 실전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재산과 위토도 몰수당했다.

부인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정연(鄭淵)의 딸인데,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의춘군(冝春君)이우직(李友直)이고, 2자는 덕양정(德陽正) 이우량(李友諒)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장릉지(莊陵志)』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가정집(四佳亭集)』
  • 『동문선(東文選)』
  • 『완당집(阮堂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근화서화징(槿域書畵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