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사(安胎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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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자녀의 태를 묻는 일을 맡은 임시 관원.

개설

안태사는 궁궐에서 태를 모시고 지방으로 내려가 태실에 안치하는 일을 책임졌다. 대개 정경(正卿) 가운데 1명을 임명하였다.

담당 직무

안태사는 태를 모시고 지방으로 내려가 태봉에 안치할 때까지, 태를 소중히 보호하는 일을 총괄하였다. 태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안태사의 품관이 다르게 정해졌으나, 왕위계승자인 원자나 원손의 경우, 대체로 중신 가운데 1명을 선정하였다. 안태사는 종사관을 비롯해 배태관(陪胎官)·서표관(書標官)·전향관(傳香官)·주시관(奏時官) 등 중앙에서 파견되는 여러 관원들을 이끌고 태실 예정지까지 가서 태를 안치하였다.

태를 모시고 궁궐에서 출발하는 날, 안태사는 다른 관원들과 함께 흑단령을 입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담당 승지로부터 태가 든 항아리, 즉 태항(胎缸)을 전해 받아 이를 누자(樓子)에 안치한다. 그런 다음 안태사 일행은 태를 모시고 정해진 경로를 따라 태실 예정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지역을 이동하게 된다. 안태사 일행이 태를 봉안하고 지방을 지날 때마다 해당 도의 감사와 수령이 교외까지 나와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안태사가 각 고을의 정청(正廳)에 태를 안치하고 서쪽에 서 있으면, 다른 관원들은 뜰에서 태를 향해 재배(再拜)하였다(『세종실록』 20년 12월 6일).

태를 묻을 때는 정해진 시각에 다른 관원들과 함께 흑단령을 입고 태를 보관한 누자를 태봉 위에 모셔 둔다. 태항이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도록 두껍게 싸 두었던 모장피(毛獐皮)와 홍모전(紅毛氈), 바깥 질항아리를 제거한 뒤, 청향사(靑鄕絲) 세 겹으로 꼰 끈으로 더 싼 다음 붉은 글씨로 ‘○○○태, 안태사 신 ○○○’이라고 쓴다. 석옹(石甕) 속에 안치하고 개석(蓋石)을 얹은 뒤, 좋은 황토를 덮어 단단히 다지고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를 지내면 안태사의 임무는 마무리된다. 태를 태실에 무사히 안치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안태사 일행은 왕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헌종의 태를 안치하기 위해 안태사이지연(李止淵)은 1827년(순조 27) 11월 6일에 한양을 출발하였다. 그달 10일에 충청도 덕산현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가야산 아래 명월봉 태실을 만들 장소에 나아가 충청도관찰사서준보와 함께 태를 묻었다. 그리고 11월 15일에 한양에 돌아와 왕에게 경과를 보고하였다. 안태사가 지방으로 오가는 데 10일 정도의 일정이 소요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왕실의 태실을 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조성하였으므로, 안태사가 지방에 머무는 기간은 더욱 길었다. 연산군은 1501년(연산군 7) 6월 10일에, 승지권주(權柱)에게 명하여 안태사로 임명되어 먼 길을 떠나는 신수근(愼守勤)을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도록 하고, 손수 지은 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안태사는 상당히 먼 길을 오가야 했기 때문에 지인들이 따로 전송하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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