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사(安養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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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왕건이 창건한 경기도 안양의 절.

개설

안양사(安養寺)는 경기도 안양의 삼성산(三聖山)에 있는 절이다. 고려의 태조왕건이 승려 능정(能正)을 만나 창건하였다. 고려중기 이후에는 무신 집권에 반대하여 불교계의 여러 사찰과 모의하여 최충헌을 죽이고자 하였다. 불교가 탄압받았던 조선시대에는 유생들과 지방 수령들이 유흥 장소로 활용할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며, 중건할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안양사는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왕건이 지금의 시흥과 과천 지역을 징벌하고자 삼성산을 지나간 것이 창건의 계기가 되었다. 왕건이 이 산을 지나다가 산꼭대기의 구름이 다섯 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는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그곳에 능정(能正)이라는 늙은 승려가 있었다. 이때 왕건과 능정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안양사가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7층탑을 세웠는데,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다고 한다. 맨 아래층에는 12칸의 회랑(廻廊)을 만들고 벽마다 부처와 보살, 그리고 인천(人天)의 상(像)을 그려 크고 화려한 규모가 다른 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양사는 무신 집권기에 수난을 당한다. 1217년(고려 고종 4)에는 안양사와 흥왕사를 비롯하여 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왕륜사(王輪寺)와 광주(廣州)의 수리사(修理寺) 등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들의 반란은 관군에 패배하여 무려 800여 명의 승려가 참살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와 같은 반란은 무신 집권으로 인해 그동안 왕실과 문신 귀족의 비호를 받아오던 사찰들이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후기에는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최영(崔瑩)이 당시 주지였던 혜겸(惠謙)과 도모하여 창건 당시 세워진 7층탑을 2개월 만에 중건하였다.

변천

안양사는 온천으로 이름났었다. 1411년(태종 11)에 태조가 온양으로 온천욕을 가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이 반대하므로 금주(衿州) 안양사에 가서 탕목(湯沐)하였다(『태종실록』 11년 9월 12일).

안양사는 조선전기에 대대적으로 중건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조(禮曹) 판서(判書)허후(許詡)는 안양사가 대대적인 중건 공사를 하고 있음에도 세종이 이를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불법(佛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매우 두렵다고 지적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21일). 이를 통해 세종대에 안양사의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 발굴 조사 과정에서 동·서 회랑지가 연결되고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으로 이어지는 안양사의 가람 배치가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