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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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선승이자 정치가.

개설

안토도산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승인 사승(使僧) 가운데 한 명이다. 애초에는 모리씨(毛利氏)의 측근으로 활약했으며, 모리씨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복속한 뒤로는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덕천씨(德川氏)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여, 1600년의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도 서군 진영에 가담하였다. 전후에 사로잡혀 경도(京都) 육조(六條) 강가에서 처형되었다.

가계

안국사의 부친 무전신중(武田信重)은 안예국의 은산성주(銀山城主)였다. 무전씨(武田氏)는 청화천황으로부터 원성(源姓)을 하사받은 일족인 청화원씨(淸和源氏)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갑비국(甲斐國)의 종가 외에도 일찍이 안예국, 약협국(若狹國), 상총국(上總國) 등에 분가가 산재하였다. 안국사의 부친 신중은 안예 무전씨의 후예로 그 가계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동 사항

1541년 은산성이 모리씨에게 함락되었을 때 안예국 안국사로 피신하였다. 안국사라는 호칭은 이 안예국 안국사로의 피신과 장기체류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에 이르러 동복사(東福寺) 축운혜심(竺雲惠心)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심을 통해 모리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모리씨의 중국(中國) 지방 제패 과정에서는 니자씨(尼子氏), 대우씨(大友氏)와의 화평교섭에 임했다. 1573년에는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경도로 향했는데, 이때 목하등길랑수길(木下藤吉郞秀吉), 즉 훗날의 풍신수길과도 접촉하였다. 당시 신장의 몰락과 수길의 도약을 예언하는 문장을 남긴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1583년 천악[賤ヶ岳] 전투를 계기로 모리씨가 수길에게 신종하자, 이후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이끄는 육번대(六番隊) 소속으로 종군하였는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 의해 전라도 지역 공격이 좌절되기도 하였다. 1592년 8월에는 금산에서 조헌과 영규가 이끄는 의병과 격돌하였는데, 이때는 조선 의병이 패배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석전삼성(石田三成) 등과 연계하여 덕천가강(德川家康) 타도를 도모하였다. 1600년 관원 전투에서 패하여, 전후에 처형되었다. 안국사 몰락의 사정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도망쳐 온 강사준, 여진덕의 보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묘소

경도시(京都市) 건인사(建仁寺) 내.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2005.
  • 河合政治, 『安國寺惠瓊』人物叢書, 吉川弘文館,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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