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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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성현(成俔)을 비롯하여, 유자광(柳子光)ㆍ신말평(申末平)ㆍ박곤(朴棍)ㆍ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

개설

『악학궤범(樂學軌範)』은 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성현(成俔)을 비롯하여, 유자광(柳子光)ㆍ신말평(申末平)ㆍ박곤(朴棍)ㆍ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이다. 조선초기 궁중음악ㆍ이론ㆍ무용ㆍ악기ㆍ의물 등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당시의 예악(禮樂)을 집대성한 이 책은 성현이 임금의 명을 받고, 무령군(武靈君)유자광(柳子光)ㆍ주부신말평(申末平)ㆍ전악(典樂)박곤(朴棍)과 김복근(金福根)의 도움으로 당시 장악원(掌樂院)의 의궤(儀軌)와 악보 등 및 진양(陳暘)의 『악서(樂書)』ㆍ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 등 여러 중국문헌을 참고하여 펴낸 음악이론서이다.

편찬/발간 경위

1493년 『악학궤범』이 초간(初刊)된 이후 임진왜란(1592) 이후인 1610년(광해군 2) 재간(再刊)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1655년(효종 6)에 삼간(三刊)되었으며, 1743년(영조 19) 네 번째로 복간(復刊)되었다. 초간본(初刊本)은 일본 나고야(名古屋) 소재 봉좌문고(蓬左文庫)에 전할 뿐이고 우리나라에는 없다.

1610년 악서청(樂書廳)에서 재간된 이 책은 태백산(太白山)ㆍ오대산(五臺山)ㆍ마니산(摩尼山)ㆍ묘향산(妙香山)의 사고에 분장(分莊)됐다. 태백산본(太白山本)과 오대산본(五臺山本)이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奎章閣圖書館)에 소장되어 전하고, 다른 오대산본은 장서각(藏書閣)에 전한다. 장악원 소장본은 이왕직 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거쳐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었고, 나머지 본은 모두 소실됐다.

1655년 교서관(校書館)에서 인출(印出)한 『악학궤범』을 태백산ㆍ오대산ㆍ정족산(鼎足山)ㆍ적상산(赤裳山) 사고에 분장했고, 나머지는 예조ㆍ옥당(玉堂: 홍문관)ㆍ춘방(春坊: 세자시강원)으로 보냈으며, 한 부는 예조판서이후원(李厚源)이 갖고 갔다고, 『악장등록(樂掌謄錄)』에 전한다. 오대산본과 정족산본(鼎足山本)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京城帝國大) 도서관에 보존됐다. 적상산본은 장서각(藏書閣)에 보존됐다고 하나 모두 행방이 묘연하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분실됐다.

서지 사항

9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6cm, 가로 24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예악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왕명에 따라 발간된 악서(樂書)이다. 조선왕조가 예악정신에 기초한 이상국가의 틀을 설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악학궤범』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출간의 사상적 배경은 위에서 소개한 예악정신에 기초한 음악관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대표저자 성현(成俔)의 『악학궤범』 서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성현은 예악정신에 기초해서 음악의 생성(生成), 중요성, 효용성, 국가적 필요성 등을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면서, 서문에서 잘 설파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이와 함께 예악정신의 입장에서 『악학궤범』 발간의 명분, 곧 철학적 당위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권1은 60조도(調圖)로 시작하는데, 궁(宮)에 의하여 60조의 중심음(中心音)을 빨리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으나, 이 60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론에 그쳤고, 그 중 12궁조만이 실제 사용되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4청성(四淸聲)만을 사용하여, 12궁을 그린 ‘시용아악12율7성도(時用雅樂十二律七聲圖)’, 세종 때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의 율을 시정하는 데에 그 근거를 제공한 ‘율려격팔상생응기도설(律呂隔八相生應氣圖說)’, 12율관의 길이와 둘레를 숫자로 도설한 ‘12율위장도설(十二律圍長圖說)’ㆍ‘반지상생도설(班志相生圖說)’, 『율려신서』를 인용하였으나, 실제의 음악과는 관계되지 않은 ‘양률음려재위도설(陽律陰呂在位圖說)’, 변치(變徵)와 변궁(變宮)의 사용을 이단시하고, 궁이 상(商)이나 각(角)보다 높이 되는 것을 금하는 ‘오성도설(五聲圖說)’을 설명한다.

그리고 여덟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악기를 설명한 ‘팔음도설(八音圖說)’, 연향에 쓰이는 당악(唐樂)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五音律呂二十八調圖說)’, 정현(鄭玄)의 『주례(周禮)』 주(註)와 악서를 인용하여 설명한 삼궁(三宮), 세종 때 쓰인 강신악조를 『주례』와 『송사(宋史)』의 그것들과 비교, 설명한 ‘삼대사강신악조(三大祀降神樂調)’, 한국음악의 악조(樂調)를 설명한 ‘악조총의(樂調總義)’, 세조가 창안하여 기보(記譜)에 사용한 것을 다룬 ‘오음배속호(五音配俗呼)’, 공척보(工尺譜)에 쓰이는 음명의 음 높이를 당적(唐笛) 같은 당악기 대신에 향악기인 대금(大笒)의 음으로 예시한 ‘12율배속호(十二律配俗呼)’를 설명하고 있다.

권2는 ‘아악진설도설(雅樂陳設圖說)’과 ‘속악진설도설(俗樂陳設圖說)’을 설명한 것으로 이는 실제 성종 당시의 여러 제향과 조회ㆍ연향 때 악기를 진설하는 법을 그 전의 오례의(五禮儀)와 세종 때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도설하였다. 또한 제향에 쓰이는 아악의 악보와 악장(樂章)을 게재하고, 성종 당시의 조회ㆍ연향에 쓰이는 음악의 절차ㆍ곡목ㆍ춤 이름을 세종 때의 회례연의(會禮宴儀)와 비교ㆍ기술하며, 음악을 시행하는 절차를 기술한 것으로 오례의 또는 의궤(儀軌)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권3에서는 『고려사』 악지의 당악정재(唐樂呈才)와 속악정재(俗樂呈才)를 설명하였다. 권4에서는 성종조의 당악정재도의(唐樂呈才圖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권3에 없는 박(拍)을 추가하여 그 박으로 춤사위의 변하는 것을 일일이 알려주며, 단순한 정재홀기(呈才笏記)에 그치지 않고 전래의 당악정재를 완전히 보존하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권5에서는 성종 때의 ‘향악정재도의(鄕樂呈才圖儀)’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도시(圖示)한 것 이외에 한글로 적힌 「동동」ㆍ「정읍」ㆍ「처용가」ㆍ「진작(眞勺)」의 노래를 보여 준다. 「동동」과 「정읍」의 가사는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악장가사(樂章歌詞)』에도 없고, 오직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노래이어서, 국문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권6의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과 권7의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은 먼저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에 악기의 치수를 일일이 적었으며, 그 재료를 설명하였다. 이는 실제 악기제작에 참고가 되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권8 중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의물과 복식을 그림으로 전체 모양을 그리고 여기에다 치수를 기입하고, 그에 쓰이는 재료를 적어서, 실제 그 제작을 가능하게 설명하고 있다.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은 아박(牙拍)ㆍ향발(響鈸)ㆍ무고(舞鼓)ㆍ후도처용무(後度處容舞)에서 춤추는 사람이 쓰는 악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여기에다 치수를 기입, 설명한 것이다.

권9의 ‘관복도설(冠服圖說)’은 악사(樂師)와 악공(樂工)들의 관복, 세종 때 회례연에 아악이 사용된 때의 무무공인(武舞工人)의 복식, 처용관복(處容冠服)ㆍ무동관복(舞童冠服)ㆍ여기복식(女妓服飾)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치수를 적어 그 책을 보고 관복을 지을 수 있게 설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오늘날에도 성종 당시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기술한 『악학궤범』이 폐절(廢絶)된 음악을 복구하는 실용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면에서도 중요시된다. 성종 당시의 음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음악을 비교,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또 한편 「동동」과 「정읍」의 기사는 국어국문학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한국도서해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1.
  • 국립국악원, 『국악유물도록』, 국립국악원, 2012.
  • 김수현, 『조선시대 악율론과 시악화성』, 민속원, 2012.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악학궤범』, 민족문화추진회, 1979.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속예술사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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