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질월개(阿叱月介)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해서여진 여허[yehe, 葉赫]부 출신의 아시다르한([阿什達爾漢], asidarhan)의 한자 음역어.

개설

아시다르한은 여허 나라([葉赫納喇], yehe nara)씨로 여허의 버일러 긴타이시([錦台什], gintaisi)와 동열이다. 1619년 누르하치가 여허를 공격할 때 귀부하여 니루 어전([牛彔額眞], niru ejen)이 되었고, 만주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었다. 후금으로 귀부한 이후, 입관(入關) 직전인 1641년에 사망할 때까지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 주로 조선이나 몽골에 홍타이지의 유시를 선포하는 등 사절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에도 수차례 파견되어 교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질(叱)은 본래 ‘시’라는 발음을 옮긴 것이고, 월(月)은 ‘달’을 훈독한 것이며 ‘개(介)’는 ‘합(哈)’과 비슷하게 쓰였다. 아지월개는 아시다르한을 발음대로 적은 것이며, 간혹 아질개(阿叱介)로 기록된 경우도 있었다.

가계

아시다르한은 여허의 버일러 추쿵거([楚孔格], cukungge)의 증손이다. 아시다르한의 조부는 추쿵거의 셋째 아들 니야카([尼雅喀], niyaka)이고, 부친은 니야카의 넷째 아들인 야바란[yabaran, 雅巴蘭]이다. 아시다르한은 후금 시기에 아버지인 야바란과 함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귀부하였다. 그는 여허 긴타이시의 여동생 몽골저저([孟古哲哲], monggojeje) 와 동열이었고, 몽골저저는 청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의 생모였으므로 외삼촌이라는 의미의 낙추([國舅], nakcu)라고 불리었다.

활동 사항

1621년 2월 후금과 명의 전쟁 때 봉집보(奉集堡)를 포위 공격하면서 공을 세웠고, 같은 해 3월 요양을 함락할 때 앞장서 싸웠던 공로로 1등참장에 제수되고 한 차례 죽임을 면할 수 있는 칙서를 받았다.

아시다르한은 홍타이지가 후금의 한(汗, han)으로 등극하자, 조선과 몽골의 여러 부족에 수차례 사절로 파견되어 그의 유시를 전하였다. 아시다르한은 정묘호란(丁卯胡亂) 직후인 1627년 8월에는 조선이 보낸 사신 신경호(申景琥)·박난영(朴蘭英)을 대동하고 바키란([霸奇蘭, 巴齊蘭], bakiran)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어 홍타이지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때의 사행에서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 이후 포로가 되었던 오신남(吳信男)과 이후 후금에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었던 박난영의 형 박규영(朴葵英), 강홍립(姜弘立)의 아들 강숙(姜璹), 박난영의 아들 박입(朴雴) 등이 송환되었다(『인조실록』 5년 8월 12일). 아시다르한 일행은 이해 8월 14일 조선 국왕 인조를 접견하여 홍타이지가 보낸 선물과 서신을 올렸다(『인조실록』 5년 8월 14일).

1632년에 명의 변방 관원이 사절을 보내어 화친을 의논하자고 하자, 홍타이지가 아시다르한과 버거이([白格], Begei), 룽시([龍什], lungsi) 등을 회답 사절로 보내어 화맹을 맺도록 하였다. 같은 해 이번원(理藩院, [tulergi golo be dasara jurgan])의 전신에 해당하는 몽고(몽골) 아문([蒙古衙門] monggo jurgan)의 승정(承政)에 임명되어 버일러 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 사할리연[sahaliyen, 薩哈廉] 등을 따라 몽골로 새로 정한 율령을 반포하기 위하여 20통의 칙서를 가지고 갔는데, 이때 9통을 분실하여 죄를 받았다. 1634년 5월 후금은 차하르([察哈爾], cahar) 몽골을 정벌하였는데, 이때 릭단([林丹], Ligdan) 칸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죽자, 아시다르한 등은 타이지 서렁([台吉塞冷], taiji sereng) 등 몽골 차하르 세력의 무리들을 귀부시켰다.

1636년 홍타이지가 청(淸)을 건국한 뒤, 아시다르한은 도찰원(都察院)의 승정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에는 히퍼([希福], hife)와 함께 차하르·칼카·코르친 등 몽골의 여러 부족을 다녀와 율령(律令)을 밝히기도 하였다. 아시다르한은 이해 12월 병자호란에 참가하였는데, 전봉군(前鋒軍)으로 먼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달하여 인조를 압박하였으며, 각 지방에서 올라온 조선 근왕군과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아시다르한은 이듬해 인조가 항복한 뒤, 공을 인정받아 3등부장(副將)으로 승진하였다.

아시다르한은 1641년, 명과의 전쟁에 참가하여 송산(松山)을 포위하였다. 이때 명의 총병조변교(曹變蛟)의 군사가 홍타이지의 어영(御營)을 직접 공격하였다가 격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아시다르한은 미처 이르지 못하였다는 죄로 도찰원 승정에서 파직되고 니루 장긴([牛彔章京], niru janggin)으로 세습직도 강등되었다. 이 처벌을 받고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齊木德道尔吉, 「“蒙古衙門”與其首任承政阿什達而漢」, 『內蒙古大學學報』, 2007年 4期.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