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교장(阿膠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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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화살, 가구 등을 접착하는 데 쓰는 아교를 만드는 장인.

개설

아교장(阿膠匠)은 조선전기 때 각종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軍器寺)와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관장했던 선공감(繕工監)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초기에 군기감(軍器監) 소속의 아교장은 5일마다 들어와서 근무를 하였고 세조 때에는 3번으로 나누어져 일을 하였으며 다른 장인과 합하여 체아직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직무

아교장은 소나 말의 가죽이나 뼈, 근육, 사슴의 뿔 등을 끓여서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에서 식혀서 보관하는 일을 하였다. 특히 각궁(角弓)의 제작이나 화살의 깃을 붙일 때에 아교가 필요하였는데, 아교장은 아교를 제작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붙이는 작업에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에 아교의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민어 부레를 이용한 어교(魚膠)가 개발되어 세종 때에는 각종 총통(銃筒)에 쓸 화살 깃을 붙이는 데 어교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아교장이 만들었을 것이다(『세종실록』 30년 12월 6일). 군기감에서는 어교를 확보하여 함경도 지역 등에 공급하였는데, 이것은 군기감의 아교장이 만들거나 각 지방에서 공물로 받은 아교로 충당하였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9일).

아교장은 재료 확보가 어려워서 제작할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았는데, 1470년(성종 1)에는 소가죽 5∼6장이 아교 재료로 들어가는데, 당시 쇠가죽 1장 가격이 곡식 10섬에 해당될 정도로 비쌌다(『성종실록』 1년 3월 16일).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흉년이 들면 지방에서 공물로 바치는 아교나 어교를 감해주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년 윤9월 23일).

아교장은 군기감에서 일할 때 한 끼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았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세조 때에는 한번에 2명씩 일을 하였으며 명유장(明油匠), 시복장(矢服匠), 조각장(雕刻匠)과 합하여 체아직으로 부급사(副給事) 1명의 직을 배정받았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변천

아교는 안압지 출토 목간에서도 나올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고려 문종 때에는 중국의 송나라 황제가 다른 물품과 함께 휘주(徽州)의 아교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나 아교장에 관한 기록은 없다.

조선초기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아교장이 등장하는데, 세종 때에 군기감 소속 아교장이 2명에서 4명으로 증원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이 아교장은 세조 때에 들어와서 인원이 6명으로 늘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그러나 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경공장으로 군기감에 2명, 선공감에 2명이 있어 군기감의 경우 세조 때보다 인원이 축소되었다. 이후 아교장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이후에는 아교장의 직종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군기시에서 아교를 직접 제작하지 않고 각 군영과 수영에서 납품을 받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