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雙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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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중조산에 있는 절.

개설

쌍봉사(雙峰寺)는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9세기 전반 혜철(慧徹), 도윤(道允) 등의 선승(禪僧)이 머물렀다. 도윤의 법을 계승한 징효절중(澄曉折中)은 강원도 영월 흥녕사(興寧寺)에 사자산문(獅子山門)을 개창하였다. 그러므로 쌍봉사는 사자산문의 모태가 된다. 조선초 세조가 토지와 노비 등을 내려주고, 각종 부역을 면제해 줄 때 내리는 문서인 사패교지(賜牌敎旨)를 내려 절을 지원하였다. 세조의 원당(願堂)을 설립하여 매년 수륙재(水陸齋) 등의 재(齋)를 봉행하였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3층의 목탑이 유명하였는데, 1984년 소실돼 1986년에 복원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라 때인 839년(신라 문성왕 1) 동리산문(桐里山門)의 개산조 혜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는 것이다. 이후 847년(신라 문성왕 9) 철감(澈鑒) 선사(禪師) 도윤이 머물렀다. 선사는 825년(신라 헌덕왕 17)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남전은 "중국의 법(法)이 신라로 넘어간다."고 할 정도로 선사의 뛰어남을 찬탄하였다. 선사가 847년에 귀국하여 금강산에서 법을 펼치는데 경문왕도 이때 귀의하였다. 이후 쌍봉사에서 평생 주석하여 쌍봉 화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868년(신라 경문왕 8) 입적 후 절에 철감선사승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 170호)가 건립되었다. 고려시대 들어 1081년(고려 문종 35) 혜조(慧照) 국사(國師)가 중창하였다.

(2) 조선시대

세종대(1436~1449)에 전라도관찰사김방(金倣)이 절의 중창을 후원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457년(세조 3) 세조가 노비와 토지를 하사하고 모든 잡역을 면제, 각별히 보호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1468년(세조 14) 세조가 서거하자 절에서는 이 공덕을 기리는 원당을 건립하였다.

1503년(연산군 9) 조정에서 절의 수륙재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왕실의 위패를 봉안한 쌍봉사와 경상도 견암사(見巖寺), 황해도패엽사(貝葉寺) 등에서 수륙재를 행하는데 국가의 향축사신(春祝使臣)으로 병조(兵曹) 소속의 충의위(忠義衛)를 보내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1월 28일). 이때까지 여전히 세조의 원당으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수륙재가 지속되었다. 억불의 시대에서도 절은 국가의 원당이 되면서 상당한 토지를 하사받았고, 제반 잡역을 면제받았다. 또한 토착 권세가들의 핍박을 받지 않는 등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562년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1574년 『지장보살본원경』, 1576년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등의 목판을 조성할 수 있었다.

1628년(인조 6) 요의(了誼)가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633년(인조 11)에는 인환(印幻)이 팔상탱화를 조성하였다. 1667년(현종 8) 무렵 운혜(雲惠) 등이 목조의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보물 제1726호)을 조성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석가여래·가섭존자·아난존자의 삼존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는 등 19세기까지 크고 작은 조성과 중건이 이어졌다.

(3) 현대

현대에 들어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62년 이후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1984년 3층의 대웅전이 실화로 소실되었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7, 광주·전남의 전통사찰Ⅱ』, 사찰문화연구원, 1996.
  • 목포대학교박물관·화순군, 『쌍봉사』, 목포대학교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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