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지역(深河之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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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광해군 10)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양호(楊鎬)가 지휘하는 명군이 후금군에게 패한 전투.

개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gaci, ᠨᡠᡵᡤᠠᠴᡳ)는 여진 세력을 결집해 힘을 키운 뒤 명에 대한 ‘일곱 가지 원한[七大恨]’을 갚겠다며 무순(撫順)을 공격해 점령했다. 누르하치는 계속해서 명의 요충지를 공격해 만주 지역의 주요 거점이었던 청하(淸河)까지 함락시켰다.

누르하치의 군대가 무순과 청하를 점령하자 명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명은 대규모 정벌군을 모집하는 한편 누르하치를 협공하기 위해 조선에도 지원군을 파병하도록 요구했다. 광해군은 끝까지 출병을 피하려 했지만 명의 집요한 압력을 계속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국내에서도 많은 수의 신료들이 명을 돕기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부득이하게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15,500명의 병력을 선발하여 그중 약 13,000명을 출동시켰다. 조선군은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가급적 전투를 피하려고 했지만 전선의 상황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했다. 더욱이 조선군은 충분한 군량을 제공받지 못했고, 악천후 때문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군은 후금의 장수 귀영개(貴英介)가 이끄는 철기(鐵騎) 3만의 기습을 받아 궤멸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약 9,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상실했다. 조선군이 북방 지역으로 출병했던 전투 중에서는 건국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동북아시아는 격변의 시대를 맞았다.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명은 만력제(萬曆帝)의 재위 기간 동안 내부 모순에 휩싸여 패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장거정(張居正)의 개혁 정치로 명은 잠시 부흥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죽고 나자 만력제의 태도는 돌변했다.

명의 여진에 대한 통제정책은 만력제의 재위기에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여진 세력들은 명의 통제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통솔하던 훗날 후금이 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은 주변의 세력을 통합하면서 급격하게 성장했다. 누르하치 집단은 만력제의 재위 초반기에는 명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자신들에게 투항했던 한인(漢人)들을 명에 송환했다.

1583년(선조 16)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요동총병(遼東總兵)이성량(李成梁) 휘하에서 해서여진(海西女眞) 소속의 아태(阿台) 세력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오해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량은 이 문제에 대한 보상책으로 누르하치에게 명과 교역할 수 있는 권한을 칙서 30통과 말 30필로 확장해 주었다. 아울러 누르하치가 명 조정에서 도독첨사(都督僉使)의 관직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성량의 조치는 누르하치가 다른 여진 부족에 비해 정치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었다.

명은 건주여진의 급격한 성장을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건주여진의 급속한 성장은 만주의 여러 부족을 통제하면서 이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될 만한 집단이 나타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명의 정책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하지역(寧夏之役)·양응룡(楊應龍)의 난·임진왜란의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 발생하게 되었다. 명에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다. 이를 통해 명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명은 국가 재정이 만성 적자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만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1596년(선조 29) 누르하치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독립적 국가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1603년(선조 36)에는 훼도알라[赫圖阿拉]로 수도를 옮기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1605년(선조 38)에 이르러서는 국호를 건주국(建州國)으로 변경했다.

발단

선조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급속하게 성장한 누르하치 세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여진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회유책을 실시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에게 다양한 물화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그들이 산삼 채취를 위해 조선 영내에 들어와도 죽이지 말라는 등의 조치를 하였다. 광해군 역시도 여진 세력에 대한 방어 체제를 강화하면서도 회유책을 펼쳐 재위 중반까지는 조선과 건주여진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1616년(광해군 8) 4월, 누르하치는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설립을 공표했다. 그리고 1618년(광해군 10) ‘일곱 가지 원한’을 명분으로 제시하면서 명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무순성을 함락했다. 그리고 무순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던 광녕총병(廣寧總兵)장승음(張承蔭)의 군대 1만을 격파했다. 이후 만주 지역의 요충지였던 청하까지 함락했다.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명은 대규모 정벌군을 모집하는 한편 누르하치를 협공하기 위해 조선에도 지원군을 파병하도록 요구했다.

경과

광해군은 명의 파병 요청에 대해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사정을 명분으로 거절하고자 했다. 하지만 비변사는 화이론(華夷論)에 바탕을 두고 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출병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 광해군은 명이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 승인을 거부했었기 때문에 명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었다. 더욱이 내부적으로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군대 파병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의 압박과 조정 신료들의 반발 때문에 광해군은 조선군을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우선 강홍립을 도원수로 발탁하여 군사를 파견했다. 참전은 하되 가급적 전투를 피하라는 것이 광해군의 지시였으나, 전선이 복잡해 전투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아울러 조선군은 충분한 군량을 제공받지 못했고(『광해군일기』 11년 2월 28일), 악천후 때문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후금의 장수 귀영개가 이끄는 철기 3만의 기습을 받아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당시 전투에서 조선군은 9,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상실했다. 조선군이 북방 지역으로 출병했던 전투 중에서는 건국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

심하 전투의 대패는 이후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선 조선이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1만이 넘는 군사를 동원한 것은 무리였다. 군사의 징발과 군량의 운반, 증세 등으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은 큰 고통에 시달렸다. 더욱이 출동 병력 중 9할에 달하는 군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갔다.

참고문헌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강성문, 「조선시대 여진정벌에 관한 연구」, 『군사』18,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1989.
  • 고윤수, 「광해군대 조선의 요동정책과 조선군 포로」, 『동방학지』12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 신명호, 「광해군의 대후금 외교정책 분석」, 『군사사연구총서』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 최호균, 「조선중기 대여진 관계의 연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5.
  • 한명기, 「한국 역대 해외파병 사례 연구 -1619년 ‘심하 전투’ 참전을 중심으로-」, 『군사사 연구총서』제1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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