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沈惟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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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강화를 주도했던 명나라 관원.

개설

심유경은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담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명 조정을 속였다. 결국 강화는 결렬되었고 일본은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가계

심유경은 절강(浙江) 가흥(嘉興)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평호(平湖) 또는 복주(福州)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명사(明史)』에 그를 시중의 무뢰한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문은 보잘것없었던 것 같다.

활동 사항

심유경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명나라의 병부(兵部) 상서(尙書) 석성(石星)에 의해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발탁되어 조선에 왔다. 심유경이 발탁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가 일본과 밀무역을 하여 일본의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 그가 왜구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상촌집(象村集)』에는 그가 간첩으로 왜적을 독살한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성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칠 방안을 공모했는데, 일본의 허실을 정탐하여 대책을 세우자는 심유경의 의견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심유경이 석성이 거느린 첩의 아버지와의 우호관계를 이용하여서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592년 7월 명에서 파견한 조승훈(祖承訓)이 일본군에게 패하자 석성은 심유경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8월 30일 심유경은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회담을 벌여 강화를 약속하고 50일간 휴전키로 합의했다. 명으로 돌아간 심유경은 일본은 단지 조공과 책봉[封貢]만을 바란다는 보고를 했다.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평양성을 탈환하자 회담이 결렬되었다. 하지만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자 명은 다시 강화를 시도했다. 일본은 강화를 위한 조건으로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명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한두 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자신을 일본의 왕으로 책봉해 줄 것과 명에 대한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명에 보고하였다. 이와 함께 심유경은 소서행장에게 일본의 항복문서를 요구했고, 1594년 12월 3일 소서여안(小西如安)은 정식으로 명에 항복문서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명은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하였다.

1596년 1월 심유경은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소서행장 등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산에 머물고 있던 정사이종성이 일본군 진영을 탈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심유경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풍신수길을 만나 이종성 탈출 사건에 대한 경위를 해명했고, 이후에도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풍신수길을 만났다.

이종성이 탈출하자 명 조정은 양방형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강화를 성사시키려 했다. 1595년 9월 명의 책봉사 일행은 풍신수길을 만났지만, 명과 일본의 요구조건이 상반되어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명 사신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던 황신(黃愼)은 이러한 사실을 조선에 알리려 했지만 심유경은 자신이 명 조정을 속인 것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방해하기도 했다.

강화교섭은 결렬되었지만 심유경은 1596년 10월 25일 대마도(對馬島)에서 책봉에 감사하는 풍신수길의 위조문서를 작성하여 강화교섭 실패를 숨기려 하였다. 하지만 1597년 1월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면서 심유경이 명 조정을 속인 사실들이 탄로 나게 되었다. 명은 심유경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이 침략할 때 길 안내를 할 것으로 의심하여 그를 체포토록 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8일).

학문과 사상

조선에서는 심유경을 말을 잘하는 변사(辯士)로 평가했다(『선조실록』 25년 6월 29일). 이후 심유경이 강화를 위해 조선 4도를 할양키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그를 패역무도한 존재로 규정했고(『선조실록』 27년 2월 2일), 또 간악한 인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7년 6월 17일). 명의 흠차부도어사(欽差副都御史)는 심유경을 무뢰배란 뜻의 ‘곤조곤도(棍曹棍徒)’로 표현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20일). 이로 볼 때 조선이나 명에서는 심유경을 학문이나 사상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상훈 및 추모

심유경은 강화교섭이 거짓임이 탄로 난 후 엄한 형벌에 처해질 뻔했으나, 석성에 의해 구제되었다. 그러나 그 뒤 조선에 다시 들어와 화의를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경상남도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사로잡혔다. 명 조정은 그를 금의위(錦衣衛)의 옥에 가두었다가 거리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정결서, 「만력 24년 일본 부사(副使) 심유경(沈惟敬)의 일본행적 고찰」, 『경남학』33,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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