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實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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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효령대군에 의해 중창된 부안의 사찰.

개설

실상사(實相寺)는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사찰로, 창건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5세기 중반 효령대군의 주도 하에 세조와 양녕대군 등 왕실 친인척의 보시로 건물과 불상이 중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502년에 조옥곤(趙玉崑)이 실상사의 전결(田結)이 많으므로 학전(學田)에 소속시키자고 국왕에게 건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실상사를 방문하여 남긴 시와 수필들이 남아 있다. 이 절의 불상 복장에서 발견된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은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특징

실상사는 부안 변산반도의 능가산(楞伽山)에 소재하고 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실상사의 소재만 기록하고 있을 뿐 사찰 내력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1502년에 조옥곤(趙玉崑)이 실상사의 전결(田結)이 매우 많으니 학전(學田)에 소속시키자고 임금에게 요청한(『연산군일기』 8년 8월 12일)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절의 규모가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휴정의 제자인 영허해일(暎虛海日)이 실상사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1914년에 실상사 불상 복장물에서 발견된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보물 제398호)을 들 수 있다. 구한말에 이강제(李康濟)가 실상사에서 베껴 쓴 「능가산실상사사적기(楞伽山實相寺事蹟記)」에 따르면, 1462년에 삼존불(三尊佛)을 조성할 때 효령대군이 중창주가 되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비롯한 왕실의 유력 인물들이 참여하였고, 4년 뒤 1466년에는 건물이 중창되었다고 하였다. 이때 효령대군은 중창 발원문과 보권사(普勸詞)를 지어 불사를 주도하고, 비로자나불·약사불·무량수불 삼존상을 조성하였다. 즉 15세기 중반에 실상사 중창 및 불상 조성에 왕실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당시 실상사가 부안 변산반도 여러 사찰 가운데 으뜸가는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광세(沈光世)의 「유변산록(遊邊山錄」에 "용연 뒤편에서 불꽃놀이를 본 뒤 온 길을 되돌아와서 청임동 입구로 나왔다. 10여 리를 가서 실상사에 도착하니 광릉(세조)의 원당이다. 절의 규모가 크고 높았으며 불상이 매우 성대하게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박미(朴瀰)는 실상사에 대해 시를 남긴 후에 "승려 인오가 입적하고 다비하여 사리가 이곳 실상사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인오는 청매인오(靑梅印悟)를 말한다. 그는 서산 대사 청허휴정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지리산을 중심으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노년에 부안 실상사에서 머물다 입적하였다.

강세황(姜世晃)이 쓴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서는 "가마를 타고 20여 리를 가서 실상사에 도착했다. 사찰이 매우 웅장하였지만 지금은 많이 퇴락하였다. 사찰 승려가 나와 검은 동으로 만든 향로, 구학, 양지병 등 옛 물건들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그 제작 기법이 기이하고 정교하였다. 구학은 승려들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이것은 학 모양의 입에 향을 꽂아서 불을 붙이는 향로의 일종’이라고 하니 승려들이 서로 보며 믿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한바탕 웃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집의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실상사가 17세기까지 번성하다가 18세기 이후 퇴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원불교 교조인 박중빈(朴重彬)이 실상사 옆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3년간 수도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이곳은 원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변산성지(邊山聖地)로 일컬어진다.

참고문헌

  • 『휴옹집(休翁集)』
  • 『분서집(汾西集)』
  • 『표암고(豹菴稿)』
  • 김영두, 「능가산 월명암 실상사고」, 『한국종교』6,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81.
  • 안승준·유학영, 「『월인천강지곡』의 부안 실상사 소장 경위와 그 전래 과정」, 『장서각』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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