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新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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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병영·수영 등의 재정을 충당하는 데에 활용되었던 군인.

개설

신선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596년(선조 29)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죄수 중 신선 유경룡이 있었다는 점에서 1596년 이전에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신선은 군대에 편성되지 않은 외방의 사족이나 업무(業武)를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친병(親兵)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치한 신선정로위(新選定虜衛)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도내의 부유하고 권세 있는 무리가 신역(身役)을 면하려고 신선에 들어오고, 병영·수영은 번(番)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포(布) 등을 받음으로써 신선은 재정을 확보하는 군대로 변질되었다. 신선이라는 말은 새로 뽑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선군을 의미하는 신선과 구별이 필요하다. 신선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신선은 원래 군대에 편성되지 않은 사족이나 업무를 병영이나 수영에 돌아가며 입번(入番)시켜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 휘하의 친병으로 삼기 위해 설치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5월 6일). 하지만 병영·수영은 신선의 번을 면제해 주고 포·무명[木]·돈 등을 받으면서 신선은 병영·수영의 재정을 충당해 주는 군대로 활용되었다.

신선은 감영과 수군의 거진(巨鎭) 등에도 설치되었는데, 충청도의 경우 신선은 ‘감영에 403명, 안흥진에 235명, 소근진에 86명, 평신진에 60명’이 설치되었으며, 1명당 2냥을 받아 방군급대(防軍給代)나 관수(官需) 등에 사용하였다.

변천

1596년(선조 29)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홍산의 죄수 중 신선 유경룡이 있었다는 점에서 신선은 1596년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는 문벌과 재능을 살피지 않고, 심지어 정군에 편성된 자에게도 공공연히 돈을 받고 신선에 소속시켜 주었다. 때문에 신선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군역에 편성될 장정이 날로 줄어갔다. 더욱이 병영·수영에 소속된 신선의 번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 등을 받아 병영·수영의 재정을 충당하는 데에 이용함으로써, 신선은 재정을 확보하는 군대로 변질되었다.

한편 신선은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부역실총(賦役實總)』
  • 『호서읍지(湖西邑誌)』
  • 서태원, 「조선 후기 충청도 안흥진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실학』51,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