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찰단(視察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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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과 대한제국기 일본의 문물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원이거나, 혹은 일본에서 한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한 단체.

개설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김기수와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수신사들은 귀국한 후 서양의 근대 문명과 일본의 문물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하여 문물제도의 습득을 추진하였다. 시찰단은 수차례에 걸쳐 파견되었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반면 일본 측에서도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방하면서 식민지 통치를 위한 현지 조사를 위하여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시찰단은 조선과 일본에서 운영한 두 종류의 형태가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종은 서양 세력의 청국 침략, 일본의 대만 진출 등을 통하여 동아시아 세력의 재편과 대외적 위협을 감지하고 그 대비책으로 개항과 함께 근대 문물의 습득을 추진하면서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초기 시찰단에는 박정양·엄세영·조병직·민종묵·조준영·심상학·어윤중·홍영식·이원회·이헌영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초기 시찰단은 일본 정부의 조직 기관에 파견되었는데,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제사(製絲)·잠업(蠶業) 등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종이 초기에 파견한 시찰단은 동래부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라고 호칭하였다. 예컨대 1881년 1월 일본에 비밀리에 파견된 어윤중·조준영·박정양·엄세영·강문형·조병직·민종묵·이헌영·심상학·홍영식 등은 동래부암행어사라고 불리었으며, 귀국 후에는 시찰 내용을 기록한 문견기(聞見記)를 고종에게 제출하였다(『고종실록』 18년 12월 14일).

시찰단의 구성원은 주로 조선 사회의 상류층이거나, 정부 내 실무 담당자들이었다. 예컨대, 1904년 9월에 고종은 정부 고관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학부(學部) 대신(大臣)이재극은 학문의 제도 및 사무, 군부(軍部) 협판(協辦)엄주익은 군사제도 및 사무,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민형식은 내무성의 제도 및 사무,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이상천은 법률의 제도 및 사무, 예식원(禮式院) 참리관(參理官)현백운은 궁내성의 제도 및 사무, 경위원(警衛院) 경무관황신태는 경찰제도 및 사무를 시찰하고 오도록 하였다.

변천

시찰단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어졌으며, 일제시대까지 진행되었다. 1910년 조선귀족관광단, 1911년 기독교시찰단, 1912년 유림시찰단, 1914년 조선진신내지시찰단(朝鮮縉紳內地視察團), 1915년 실업시찰단, 1917년 불교시찰단, 1919년 잠업시찰단(蠶業視察團) 등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파견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된 면목을 습득 내지 교육받아 한국 내에 도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친일적이거나 외세 지향적 태도를 보였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에도 조선 사람들을 일본화하려는 목적으로 시찰단을 적극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제국 관보(大韓帝國 官報)』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허동현, 『조사시찰단 관계자료집』, 국학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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