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試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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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출제되는 시험문제.

개설

시제(試題)는 시험 과목에 따라 출제하였다. 제술(製述)시험의 주요 과목인 의(疑)·의(義)·시(詩)·부(賦)·표(表)·책(策)의 문체에 따라 다루는 문제의 범위와 글을 작성하는 법식이 정해져 있어 정식에 어긋나게 글을 작성하면 불합격 처리하였다. 시제는 시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왕이 참석하는 친림의 경우는 왕이 직접 출제하였다.

내용 및 특징

시제의 출제는 시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여 결정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28일). 왕이 친림하여 치르는 시험에서는 왕이 직접 출제하였다(『세종실록』 29년 8월 18일)(『중종실록』 30년 9월 3일). 시제로는 기출문제, 명나라에 저촉되는 문제, 시국을 비방하는 내용 등은 금지하였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삭직이나 유배에 처하여졌다.

시험 당일 시제를 시험장 시제판(試題板)에 게시하면 수험생은 자신의 시권에 시제를 기재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답안을 작성해서 제출하였다. 대소과 모두 두 문제가 출제되는데 순서에 상관없이 두 문제에 대해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먼저 지은 글을 상편(上篇)·주편(主篇)이라 하고, 나중에 지은 글을 비편(備篇)·하편(下篇)·부편(副篇)이라고 하였다. 두 편을 모두 지어 내는 것을 성편(成篇)이라 하였다. 성편하지 못하면 불합격으로 처리하였다.

시제는 1~2행으로 기재하는데 시험 과목에 따라 기재하는 방식이 약간씩 달랐다. 사서의(四書疑)는 ‘問云云(문운운)’, 오경의(五經義)는 서명+의(義)+제시어의 순으로 기재하였다. 『서경』이라면 서의(書義), 『예기』는 예의(禮義)라 쓴 다음 제시한 문제를 쓰는 것이었다. 시제는 고시 과목과 관련 있었다. 『경국대전』·『속대전』에서 규정하는 제술시험의 고시 과목은 15종의 과거문체였다. 이 중 많이 출제되는 과목의 문체인 의·의·시·부·표·책 여섯 가지를 과문육체(科文六體)라고 하였다.

경학은 사서의 의문(疑問)과 오경의 경의(經義)로, 문학은 시·부·표·전 등의 문장으로, 경세관은 대책으로 시험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시험하였다. 과문육체를 중심으로 시제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의(疑)는 사서(四書)의 내용 중 논리적으로 모순·상충되어 의심이 드는 부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의 제술시험이었다. 질문 내용이 시제에 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시권에 문제의 전문을 다 기재하지 않고 ‘問云云(문운운)’이라고 축약하여 기술하였다. 시권 상으로는 답문만 적혀 있어 질문 내용을 따로 적어 두지 않는 한 사서의의 시제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질문에 대답하는 제술문은 투식에 따라 작문하여야 했다. 문장의 길이는 70항 내지 80항 이상이어야 한다고도 하고 약 30항이 되도록 짓는다고도 하지만 시권 실물을 보면 통상 20~30항 정도이고 길면 40여 항 정도였다.

의(義)는 유교 경전에 기술된 내용 중 이해하기 어렵고 의심스러운 부분의 의미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질문에 해설을 제시하는 형식의 제술시험이었다. 시험 대상이 되는 경전의 수에 따라 오경의, 사경의(四經義), 삼경의(三經義)라 지칭하였다. 경의의 문제는 단구 형식의 짧은 문구 하나이고 시권에 전문을 다 기재하는데 앞에 경전의 명칭과 의(義) 자를 합하여 썼다. ‘예의 용민지력 세불과삼일(禮義 用民之力 歲不過三日)’은 1699년(숙종 25) 생원시 복시의 시제였다. ‘백성들의 힘을 사용함에는 1년에 3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예기(禮記)』「왕제」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답안 작성에서 머리 부분에는 특별한 투식어가 없으나 글을 마치고는 ‘근의(謹義)’라는 투식어로 끝을 맺었다.

시(詩): 과거에 출제하는 시는 대개 7언의 장편 고시(古詩)였다. 경사(經史)의 구절, 옛사람의 시구(詩句), 성어(成語) 등에서 따온 말을 제목으로 하였다. 시 한 편의(1편의) 길이는 『대전회통』에서는 17~18연을 채우도록 하였다. 시제(詩題)의 실례를 들어 보면, 1891년(고종 28) 진사시에 출제된 ‘구관성인지도자필자맹자시시(求觀聖人之道者必自孟子始詩)’가 있었다. 이 문제는 『맹자집주』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부(賦)는 부 형식의 문체를 짓도록 해 사장 능력을 보는 시험이었다. 부는 운문(韻文)의 일종으로 압운을 해야 하는데 영조 이후부터는 압운을 하지 않은 경향을 보였다. 부의 제목도 시와 마찬가지로 경사·고시·성어 등에서 따온 문구로 정하였다. 실례를 들면 1639년(인조 17) 진사시 초시의 시제가 ‘철연급상구부(徹宴給喪具賦)’였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지방관으로 지낼 때의 고사에서 따왔다. 부의 길이는 30연 미만으로 합격한 사례가 보이지만 19세기에 와서는 최소한 30연을 요구하였다.

표(表)는 병려문(騈儷文) 문체로 글을 짓는 시험이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문서에 표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표는 문장력을 시험하는 과목으로 비중이 아주 컸다. 시제는 대개 ‘의(擬)+고사(故事)+표(表)’로 표기되었다. ‘의’와 ‘표’ 사이에 들어가는 고사를 모르면 응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의 시제가 ‘의당동평장사양염청천하재부진귀좌장표(擬唐同平章事楊炎請天下財賦盡歸左藏表)’이었다. 당나라의 동평장사양염이 천하의 재부를 모두 좌장에 귀속시킬 것을 청한 일을 의작하는 표였다. 『구당서(舊唐書)』「양염전(楊炎傳)」에 있는 고사였다. 표는 낮은 신하가 존귀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신하 자신을 지칭하는 ‘臣(신)’ 자는 항상 작은 글씨로 쓰며, 황제의 ‘皇(황)’ 자는 한두 글자 사이를 띄어서 썼다. 『전률통보』에서는 사대문서식의 하나로 하표식(賀表式)과 진하표식(進賀表式)을 규정하였다.

대책(對策): 왕의 시무나 경의 또는 역사와 관련하여 제시한 문제에 대하여 그 해결 방책이나 해답을 진술하는 제술문이었다. 왕의 질문을 책문(策問)이라 하고 응시자의 답을 대책(對策)이라 하였다. 책문과 대책을 합칭하여 책 또는 책문이라 하였다. 대책을 통해서 국정에 관한 시국관을 고찰하지만 학술적인 역량을 살펴보는 경우도 있었다. 대책의 시제는 상당히 길어 시권에서는 대부분 ‘왕약왈운운(王若曰云云)’으로 축약하여 기재하였다.

답안 작성에는 일정한 정식이 있어 어긋나면 합격해도 소용이 없었다. 답안 작성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았다. 생원진사시와 전시(殿試)의 시권은 반드시 해서로 써야 했다. 전시 시권은 왕이 열람하기 때문에 초서로 쓰면 불경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노장(老莊)·불가(佛家)·순자(荀子)·음양서(陰陽書)·비설(裨說)을 인용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은 유학을 정통 학문으로 숭상한 나라였다. 당색(黨色)을 언급하면 안 되었다. 왕이나 역대 왕의 이름 글자를 쓰지 말아야 했다. 왕이나 존귀한 사람의 이름 글자는 말하거나 쓰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기괴한 문자를 쓰거나 암호, 낙서를 해서는 안 되었다. 왕과 관계있는 문자는 두 자 올려 써야 하고 국가와 관계있는 문제는 한 자를 올려 써야 했다. 책문의 답안지는 1행 24자, 본문은 두 자 내려 쓰고 왕이나 황제와 관계있는 문자는 두 자 올려 썼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원문은 한정되어 있고, 시제가 될 만한 것도 한정되어 있어 금년에 나온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된 문제가 외방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나올 수도 있으므로 남의 작품을 암기하였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었고, 혹 글 잘하는 사람이 한 경(經)의 경의를 다 지어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대대로 생원 정도에는 합격하는 자도 있었다(『명종실록』 8년 6월 9일).

시제가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사태의 경중에 따라 처벌의 수위가 달랐다. 1506년(중종 1) 식년시에서 시제가 이미 각 도에 내보내져 응시자들이 모르는 이가 없어 시험을 파방하고 이듬해에 다시 식년시를 실시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5일). 관리상의 부주의로 미리 시제가 널리 알려져 시험 자체가 파방이 된 것이었다. 1733년(영조 9) 황해도 향시에서 관리가 시제를 몰래 베껴 밖으로 전하다가 발각되어 시험을 주관한 시험관이 파직당하고 관련 응시자들은 조사를 받았다(『영조실록』 9년 9월 1일).

변천

전시 시권과 소과의 시권은 원래 해서(楷書)로 쓰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명종실록』 8년 6월 9일), 대개 상편은 해서로 쓰고 하편은 초서(草書)로 썼다. 17세기 이후 응시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상편만 자세히 살펴보고 하편은 살피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실제로 과장에서 1편만 택일하여 답안을 작성하기에 이르자 1714년(숙종 40)에 형식만 남은 하편을 없애 버렸다(『숙종실록』 40년 8월 22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김동석, 「조선시대 시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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