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달(時可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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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조선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피도(皮島)에 설치된 동강진에서 활동한 인물.

개설

시가달은 명말 요동의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하였던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장수였다. 모문룡의 차관으로서 조선을 방문하여 인조를 접견하기도 하였고, 동강진(東江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두만강 일대까지 올라가 후금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가 명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것은 모문룡의 휘하에서 활동한 이후로 그 이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626년에 후금군에게 피살되었다.

가계

시가달의 가족 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모문룡의 첩의 사촌이라고 하였다.

활동 사항

1622년 후금이 광녕(廣寧)을 함락한 뒤 요동은 명의 영향권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이 시기에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왔고 요동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조선에서는 모문룡을 총병(總兵)·도독(都督) 등으로 높여 불렀으나, 그가 좌도독의 지위에 오른 것은 1624년의 일이었다. 모문룡은 휘하에 모여든 요민들을 바탕으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조직하였고, 이로 인하여 요민들이 계속해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시가달은 모문룡의 휘하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1623년 3월 조선에서 반정(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시가달은 모문룡의 차관으로 심세괴(沈世魁)와 함께 조선을 방문하였다. 인조는 시가달을 접견한 자리에서 명과 협력하여 후금을 토벌할 것임을 공표하였다(『인조실록』 1년 4월 23일). 당시 요동을 상실하여 조선과의 교통이 어려웠던 명 조정에서는 피도의 동강진에 큰 기대를 걸었고, 따라서 인조는 명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모문룡을 호의로 대접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시가달 역시 후대를 받았다.

1624년 모문룡은 수비 왕만재(王萬才)를 보내어 자신이 함경도 일대를 공략할 계획을 밝혔는데, 이는 후금의 후면을 타격하여 그들을 요동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이를 위하여 유격왕보(王輔)는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咸興)으로 출동하였는데 시가달도 종군하였다. 이들은 이해 4월부터 6월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한 뒤 다시 동강진으로 귀환하였다(『인조실록』 2년 4월 16일)(『인조실록』 2년 6월 8일).

시가달 등의 행동은 효과가 없지 않았던 듯하다. 1624년 11월 명 희종(喜宗)은 성지(聖旨)를 내려 모문룡을 좌도독(左都督)으로, 시가달을 도사첨서(都司僉書)로 임명하는 등 동강진의 여러 장수들에게 공식적으로 관직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사한 관병들에게 휼전을 내렸고 또 매년 20,000석의 군량미를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시가달은 1625년 군사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에 주둔하는 등 군사 활동을 계속하였으나(『인조실록』 3년 3월 21일), 이듬해에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명희종실록(明喜宗實錄)』
  •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