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선포(乘船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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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성 밖으로 행행할 때 선창에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는 경우 호위선에서 포를 쏘아 왕의 승선을 주변에 알리거나 축하하던 것.

개설

왕이 도성을 벗어나 교외에 위치한 능침에 가는 능행(陵幸)이나 온천에 가는 온행(溫幸)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일이 발생했다. 정조대에는 수원에 원행(園幸)하기 위해 한강의 노량진에 배들을 모아 임시로 설치한 가설교인 주교(舟橋)로 강을 건너는 사례를 만들었으나, 대부분의 왕은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이용하였다. 왕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연변의 주정소(晝停所)에 도착해서 배를 타려고 할 때 시위 군사들이 탑승해 있던 배에서 승선포(乘船砲)를 쏘아 주변에 알렸다. 승선포는 왕이 배에 승선한다는 시간적 표현이자 왕권의 위의(威儀)를 청각적으로 알리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부터 왕이 경기 남부 지방으로 행행하면서 한강을 건널 경우 선창(船艙)에서 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강에 교량이 설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의 행차가 선창에 도착하면 호위하던 금군 중 일부가 승선하여 어선(御船)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왕의 이동 시간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호위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하사해 식사를 하게 한 후에 승선하기도 했다. 왕이 배에서 하선할 때에도 포를 쏘아 알렸다(『현종실록』 6년 4월 17일). 예컨대 현종이 온양에 행차할 때에는 승선포 3발을 쏘고, 배를 띄울 때에는 거정포(擧碇砲) 3발, 건너편에 도착해서 왕이 하선할 때는 하정포(下碇砲) 3발을 쏘았다. 승선포는 군기시(軍器寺)에서 발사하였다(『현종실록』 10년 3월 15일). 포를 쏠 때는 군기시의 관원이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면, 색승지(色承旨)가 거행하였다.

어가를 호위하던 시위군은 왕과 함께 승선포에 맞추어 승선하지 않았다. 왕이 머물던 선창이 소규모이고 시위에 혼란이 우려되었으므로 미리 강을 건너도록 했다. 따라서 왕의 일행이 선창에서 승선포에 맞추어 승선하기 전에 상보군(廂步軍)은 먼저 강을 건너가서 시위 진영을 갖추었다(『영조실록』 4년 8월 26일).

변천

정조 즉위 초에는 승선포와 하정포 이외에 기화(起火)와 대취타(大吹打)도 동원하였으며, 호위하던 군영에서도 포를 쏘았다. 1779년(정조 3) 8월에 정조가 영릉(寧陵)에 능행할 때는 광진(廣津)의 선창소(船艙所)에서 강을 건넜는데, 이때도 승선포에 맞추어 왕이 어선에 올랐다. 어선을 중심으로 선상군(先廂軍)은 좌측 예선(曳船) 밖에서, 후상군(後廂軍)은 우측 예선 밖에서 호종하여 건넜다. 행선포가 발사되면 기화를 올리고 대취타를 거행했는데, 호위하던 각 군영에서도 포로 응대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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