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서(陞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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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과 관직을 올려 임용하는 인사 관행.

개설

승서는 품계와 함께 관직을 올려 주는 인사 관행의 하나였다. 관직의 임기를 채운 경우를 비롯하여 국가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경우나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경우 등에 승서를 시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승서는 자급(資級)과 실직을 같이 올리는 인사 관행이었다. 1475년(성종 6) 예조(禮曹)에 내린 전지(傳旨)에서 조정 관원 중 음률을 아는 자를 선발하여 교육해서 성과가 있는 자는 승서하고, 게으른 자는 강자(降資)하도록 지시한 예가 있었다(『성종실록』 6년 10월 26일), 이 사례에서 승서는 강자와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 결국 승자(陞資)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에는 가자승서(加資陞敍)(『성종실록』 15년 4월 20일) 혹은 가계승서(加階陞敍)(『성종실록』 3년 6월 10일) 등의 용례가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1484년(성종 15) 종4품인 순천군수조숙기(曺淑沂)는 승서하라는 명령에 따라 종3품직인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에 승진되었다. 같은 시기 임수창(林壽昌) 역시 승서의 명령을 받고 정3품 당상관으로서 종3품직인 대구부사(大丘府使)에 행직으로 근무하다가 정3품 당상관직인 공조(工曹) 참의(參議)에 승진하였다.

조선시대 관직 중 통례원의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봉상시정(奉常寺正)을 비롯하여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육조(六曹) 낭청(郞廳) 등의 관직은 관직 임기를 모두 채울 경우에 당연히 승서되는 관직이었다(『성종실록』 9년 4월 21일). 이 밖에 다른 관서의 6품 이상의 관원도 관직 임기인 900일을 채우면 관직을 옮기지만 육조의 낭청처럼 승서하지 않고 평서(平敍)라고 하여 동일한 직급으로 옮겼다. 다만 재주가 뛰어나고 능력이 탁월한 자는 평서 규정에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았다.

이 같은 법에 규정된 승서 관직 이외에도 수시로나 파격적으로 승서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관원으로서 관직 생활 중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경우(『성종실록』 15년 4월 24일), 현직 관원 중 공신이나 대신의 적장자의 아들로 공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현재의 근무 일수를 계산하지 않고 승서하였다(『성종실록』 16년 1월 27일). 승서 때에는 대개 차상위 관직이나 외직에서 경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조익정(趙益貞)이 ‘1469년(예종 1) 2월 정7품직인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대한 상전으로 정5품직인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승진하였고, 1개월 뒤에 동품직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에 체직되었고, 다시 그 1년 후에는 정3품 당상관직인 형조(刑曹) 참의(參議)에 제수된’ 예와 같이 만 1년여에 정7품직에서 9품계를 초자(超資)하여 정3품 당상관직에 승서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연로한 관원을 우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승서하는 예도 있었다(『성종실록』 21년 1월 12일).

변천

조선후기 영조대에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6품 이상인 자를 승서한 경우에는 곧바로 다른 관직에 후보자로 추천하여 임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7품 이하의 관원은 6품에 한정해서 승서하도록 하였다. 또한 7품 이하의 관원을 6품 관직에 승서해서 임용할 경우에는 먼저 6품의 품계로 승급한 뒤에 임용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