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산국(習算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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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태조 3)에 『태일산(太一算)』의 강습을 위해 설치한 산술 및 수학 등과 관련한 병조(兵曹)의 관청.

개설

『태일산』은 고대에 군대를 운용하는 일과 관련한 수학 및 점술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습산국(習算局)에서는 날씨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 물시계를 운용하는 일, 병력(兵曆)의 계산 등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을 맡은 서운관(書雲觀)의 직무와도 겹치는 업무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된 업무는 차츰 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1463년(세조 9)에 습산국은 호조(戶曹) 산하의 산학중감(算學重監)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4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관청이다. 『태일산』은 중국 고대의 수학서로 군대의 운용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습산국에서는 수학뿐만이 아니라, 군대의 운용과 관련한 점도 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날씨를 관찰하여 기록하는 일, 물시계를 운영하는 일, 병력의 계산 등 서운관이 맡은 기능도 일부 수행하고 있었다. 습산국에는 별감(別監) 6명, 부사직(副司直) 체아(遞兒)가 1명, 훈도(訓導)가 2명이 있었고, 거기서 수학을 배우는 학도가 3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변천

태종 때는 습산국의 업무 중에서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 혁파되었다(『태종실록』 17년 1월 20일). 습산국에서는 훈도 한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날씨를 기록하게 하고 매월마다 그 통계치를 보고하게 하였는데, 1428년(세종 10)부터는 마치 책력(冊曆)처럼 모든 관측 자료를 보고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10년 3월 23일). 습산국에서 익히던 『태일산』은 1430년(세종 12)에 무학(武學)의 취재 시험 과목으로 지정되었다(『세종실록』 12년 3월 18일).

문종이 태일병학(太一兵學)과 습산국의 금루(禁漏)를 합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부결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1월 26일). 그러나 세조 때는 병조 휘하에 있던 태일력산관(太一曆算官)과 태일습산국(太一習算局)의 업무가 중복되었는데, 태일력산관은 병력을 계산하기 위해 평안도와 함길도에 파견되었던 직이었으나 그 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역산관 6명을 습산국으로 합쳤다. 또한 습산국의 별감과 훈도는 임무가 같으므로 모두 훈도라고 부르게 되었다(『세조실록』 3년 5월 24일).

세조 때는 습산국을 혁파하여 학도 18명은 호조에서 회계와 관련된 수학을 익히는 산학중감으로 소속시키고, 학도 12명은 역산학관(曆算學官)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한편, 1437년(세종 19)에 세종이 역산소(曆算所)를 따로 설치하여 역법 계산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게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관청에서 산술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역산소의 역산학관에게 맡기는 바람에 업무가 과중되어 수학 학습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습산국은 혁파되어 그 인원은 호조 산하의 산학중감으로 배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