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서이(瑟西爾, 瑟西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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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 함장이자 정치가.

개설

슬서이는 세실(Jean-Baptiste Thomas Médée Cécille)의 한자식 표기이다. 1804년 사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세실은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에로인(Héroïne)호의 지휘관으로 세계 일주를 하였으며, 1838년에는 해군 대령이 되었다. 1841년 12월에 세실은 에리곤 호(l’Érigone)에 선교사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신부, 벤자멩 브뤼에르(Benjamin Brueyre) 신부를 태우고 마카오에 도착하였는데,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 유역을 탐사하였다.

1843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 기욤 기조(François Pierre Guillaume Guizot)의 명령을 받은 세실은 베트남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에 프랑스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바실란(Basilan) 섬을 점령하였으나, 스페인이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바실란 섬의 점령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1844년에 세실은 해군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1846년에는 조선 서해안에 상륙해서 기해사옥 당시 조선 정부가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그리고 일본과의 교섭을 위해서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상륙에 실패하였다.

1847년 4월에 베트남에 수감된 프랑스 선교사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함대를 다낭에 파견하여서 베트남 함대와 전투를 치렀으며, 선교 증진을 목적으로 조선에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함대가 좌초되기도 하였다.

해군중장으로 전역한 세실은 1848년에 프랑스로 귀국해서 제헌국회(Assemblée Constituante)에서 센인페리외르(Seine-Inférieure) 주의 대표가 되었으며, 1849년에 주영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였다. 1852년에는 상원의원이 되었다.

활동 사항

제1차 중영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1841년에 프랑스 극동함대의 일원으로 청에 파견되었다. 1842년 2월에 세실은 조선과의 교섭을 목적으로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의 나폴레옹 리브와(Napoléon Libois) 신부에게 통역을 담당할 조선인 학생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리브와 신부는 조제프 앙브르와즈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를 추천하였으며, 메스트르 신부는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김대건을 한국어 통역관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분쟁을 염려하였던 세실은 조선과의 교섭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통역관으로 김대건의 조선 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46년 6월에 함대를 이끌고 충청도 홍주(洪州) 연안의 외연도(外煙島)에 정박한 세실은 조선 정부에게 기해사옥 당시 앵베르([范世亨], Imbert, Laurent Joseph Marie) 주교, 모방([羅伯多祿], 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 샤스탕([鄭牙各伯], Jacques Honoré Chastan) 신부를 처형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헌종실록』 12년 7월 3일). 하지만 세실의 방문과 책임 추궁은 김대건 신부의 처형과 병오사옥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47년에 세실은 전년에 조선 정부에 보낸 서한에 대한 답서를 받기 위해서 라피에르([拉別耳], La Pierre, Lapierre)가 인솔하는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전라도 고군산도에서 좌초되었다. 조선 정부는 난파한 프랑스 함대에 양식과 물자를 공급하였으며(『헌종실록』 13년 8월 9일), 라피에르는 조선 정부의 인도적 조치에 감사하는 서신을 보내었다(『헌종실록』 13년 8월 11일).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5·16권, 1975.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한불관계자료(1846~1856)」, 『교회사연구』 1,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