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행(巡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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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동양의 제왕이 국가 현안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으로 거둥하던 일.

개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는 “천자가 5년에 한번 순수(巡守)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중국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은 “천자는 해내(海內)를 집으로 삼으므로 때때로 한번 순행하여 살핀다.”고 해설하였다. 즉 순행 또는 순수는 봉건제도에 입각한 통치체제에서 천자가 제후를 만나 각종 현안을 살피는 행위를 지칭하던 용어였다. 한편 천자의 순행 또는 순수에 대응하여 제후는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천자에게 조회하였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정기 조회는 매년 춘하추동의 4차례 조회 그리고 12년마다 치르는 1차례 조회 등 5가지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봄의 조회는 조(朝), 여름의 조회는 종(宗), 가을의 조회는 근(覲), 겨울의 조회는 우(遇)였고 12년 만에 하는 조회는 은동(殷同)이었다. 부정기 조회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거행하는 시회(時會)였다.

제후가 사신을 보내 천자를 알현하는 조회 역시 정기 조회와 부정기 조회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사신의 정기 조회는 시빙(時聘)이었고, 부정기 조회는 은조(殷覜)였다. 제후 또는 제후 사신의 조회에 대하여 천자 역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제후에게 사신을 보냈다. 『주례』에 의하면 천자가 제후에게 사신을 보내는 경우로는 간문(間問), 귀복(歸服), 하경(賀慶), 치회(致禬) 등이 있었다.

천자가 순행하기 위해서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이에 따라 순행 때 머물기 위한 거처로서 행재소(行在所) 또는 행궁(行宮)을 건설하였는데, 그 원리는 『주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례』에 의하면 천자가 도성의 궁궐을 떠났을 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행궁을 마련하였다. 예컨대 험지와 평지 또는 밤과 낮이냐 등에 따라 거궁(車宮), 단유궁(壇壝宮), 유궁(帷宮), 무궁(無宮) 같은 행궁이 마련되었다. 거궁은 왕이 행행 중 험난한 곳에서 머물 때 수레를 이용해 울타리를 만든 행궁이었고, 단유궁은 왕이 행행 중 평지에서 머물 때 흙으로 담장을 만든 행궁이었다. 또한 유궁은 왕이 행행 중 낮에 잠깐 일을 보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천막으로 만든 행궁이었고 무궁은 왕이 행행 중 잠깐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엇인가를 구경하기 위해 머물 때 특별한 시설 없이 단지 건장한 호위병들만 둘러서게 하는 행궁이었다.

『주례』의 행재소 또는 행궁은 천자가 행행 중 잠깐이라도 머물기 위해 마련하는 모든 시설물을 지칭하였다. 하지만 『주례』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행궁 중에서 기준이 되는 행궁은 역시 평지에 마련되는 단유궁이었다. 단유궁은 기본적으로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단 주변에 흙으로 만든 담장을 둘렀다. 천자가 단유궁에서 제후를 접견할 때, 천자는 단 위의 당에 자리했고, 공(公)은 상등에 자리했으며 후백(侯伯)은 중등에 자리했고, 자남(子南)은 하등에 자리했다. 이와 같은 모습의 단유궁은 도성 안의 궁궐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삼국시대부터 왕의 순행 또는 순수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순행과 진흥왕의 순수가 그런 예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총 135회의 순행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비중은 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 등이다. 『삼국사기』「본기(本紀)」 정치 기사에서 순행이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순행은 성곽 축조와 궁궐 건축 기사보다는 뒤쳐지지만 관리 임명, 제사 기사보다는 많다. 즉 삼국시대 왕에게 순행은 관리 임명이나 기사보다 더 중요한 정치 행위로서 명실상부 국가 현안의 하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의 순행이 국가 현안을 살피기 위한 목적보다는 유교 의례를 시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았으므로 당연히 순행, 순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사용하였다. 예컨대, 1433년(세종 15) 세종이 헌릉(獻陵)에 가는 것을 순행이라 했으며(『세종실록』 15년 4월 23일), 세조의 경우 재위기간 중 원거리 행행을 하는 경우 순행이라고 표현하였다(『세조실록』 3년 7월 12일). 성종대에도 문묘에 알성하기 위해 행행한 것을 순림(巡臨)이라고 하여 순행이 천자만이 사용한다는 논리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의 행차는 후대로 갈수록 순행보다 행행(幸行), 능행(陵行), 원행(園行), 온행(溫幸) 등 행행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 많다. 이때 사용하는 행(幸)도 천자의 순행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조선 왕이 순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또한 순종황제 시 순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뒤였으므로 황제 의례에 맞추어 행행 의례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행행의 대체 용어로 순행을 사용했다고 보인다.

조선시대 왕의 순행 중 큰 비중을 차지한 능행은 유교의 길례(吉禮)를 거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국토방위 및 군사훈련을 위한 순행도 있었다. 이외에 질병 치료와 관련된 순행으로서 온행이 있었다. 조선시대 왕 중 많은 수가 당뇨나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여기에 온천욕이 최고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왕들은 자신이나 대비, 왕비 등의 치료를 위해 자주 온천에 행차했다. 온천 중에서 충청도의 온양 온천이 가장 애용되었다. 온양온천은 세조를 비롯하여 현종, 숙종 등 여러 왕이 즐겨 찾았다. 조선시대의 왕이 한양에서 온양까지 행차하는 데는 며칠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온양 온천에는 물론 한양에서 온양에 이르는 중간 중간에도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웠다. 한양에서 온양온천에 행차하는 노선은 서울-과천-수원-진위-직산-천안-온양이었다. 이곳에는 각각 행궁이 건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능행, 원행, 온행 등 왕의 순행이 결정되면 우선 정리사(整理使),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및 왕의 시위 병사들을 지휘할 대장과 수행할 인원 및 도성에 남을 인원이 정해졌다. 정리사는 보통 순행에 관련된 경비 관련 업무를 총괄하였다.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은 궁궐과 수도방위를 책임졌다. 왕을 호위하는 대장은 순행 시 왕의 호위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아울러 육조(六曹)에서는 각각의 업무 내용에 따라 순행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왕의 순행은 순행에 따른 무수한 의전과 경비 이외에도 국정을 간단없이 운영하기 위하여 다양한 대책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변천

조선시대 거가(車駕)를 이용하던 왕의 순행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크게 변했다. 먼저 제후 체제가 황제 체제로 바뀌면서 거가에 수반되는 각종 의장물이 황제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새로이 전차, 열차와 자동차 등 근대 교통체계가 도입됨으로써 순행의 방식과 규모도 바뀌었다. 예컨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되기 1년 전인 1909년(융희 3) 초에 거행된 순종의 남순행(南巡幸)서순행(西巡幸)에서는 궁정 열차가 이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신명호, 「조선후기 국왕 行幸時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30-2,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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