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친왕(肅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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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종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의 맏아들 아이신기오로 호오거[aisin gioro hooge, 愛新覺羅 豪格]의 봉작호.

개설

호오거는 처음에는 버일러였다가 1632년 7월에는 호쇼이 버일러([和碩貝勒], hošoi beile)에 봉해졌으며 홍타이지가 황제에 등극한 뒤 호쇼이[和碩] 파풍가 친왕([肅親王], hošoi fafungga cin wang)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숙부인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함께 좌익군(左翼軍)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이후 청의 입관(入關)에 상당히 기여하였으며 사천(四川) 지역의 장헌충(張獻忠)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의 후사 문제로 도르곤과 대립하였고, 도르곤이 섭정왕(攝政王)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뒤 봉작이 삭탈된 채 유폐되었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순치제의 친정(親政) 이후에 봉작이 회복되었다. 조선 측 기록에는 호구(虎口)·호구왕(虎口王)·호고벌어(好古伐於) 등으로 나타나는데, 호고벌어는 호오거 버일러([貝勒], beile)를 풀어쓴 것이었다.

가계

호오거는 청 태종홍타이지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홍타이지의 두 번째 부인인 암바 푸진([二任大福金], amba fujin), 울라나라([烏喇納喇], ula nara)씨이다. 만주 정남기인이다. 정부인은 하다부의 우르구다이([吳爾古代], urgūdai)의 둘째 딸인 하다나라([哈達納喇], hadanara)씨이다. 그 밖에 후처였다가 이후에 숙친왕의 정실이 되는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 borjigit)씨를 비롯하여 12명의 부인이 있었다. 호오거는 총 7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중 2명이 봉작을 받았다.

활동 사항

호오거는 일찍부터 아버지를 쫓아 몽골의 여러 부락을 정벌하여 전공을 수립하고 할아버지 누르하치로부터 버일러로 봉해졌다. 1626년 호오거는 암바 버일러([大貝勒], amba beile) 다이샨([代善], daišan)을 따라서 몽골 자루트부([扎魯特], jarut)를 정벌하였다. 당시 호오거는 매우 용맹한 인물로서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1627년 홍타이지가 후금의 한(汗)으로 즉위한 뒤에 영원과 금주를 공격하자, 호오거는 금주에서 명군과 크게 싸워 격파하였다. 그 뒤에 다시 한 갈래의 군대를 이끌고 탑산(塔山)의 양곡 운반을 호송하였다. 1628년에는 버일러 지르갈랑과 함께 몽고(몽골) 구터이 타부낭([顧特塔布囊], gutei tabunang)의 부락을 정벌하여 그들의 군사를 격파하고 구터이 타부낭을 살해한 뒤, 그 부락을 거두었다.

1629년 10월, 호오거는 세 번째 버일러[三貝勒] 망굴타이와 함께 통주(通州)를 순시하고 명의 수도 북경(北京) 및 인근의 영평(永平) 등지를 공략하였다. 1632년 후금이 차하르를 정벌할 때 세운 공으로 호쇼이 버일러에 봉해졌다.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에 등극하여 청을 건국한 뒤, 호오거는 호쇼이 파풍가 친왕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는 도르곤과 함게 좌익군의 수장이 되어 창성(昌城)을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좌익군은 평안도 영변과 함경도,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고 이듬해 1월 초순에 남한산성으로 집결하였고, 강화도를 함락하여 조선을 굴복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오거는 1638년 8월에 도르곤과 함께 명조로 진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4월에 회군하였다. 당시 호오거는 도르곤·도도 등과 홍타이지의 후계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이 사실은 조선에까지 알려져 있었다(『인조실록』 16년 8월 4일). 1641년 3월에는 군왕(郡王)으로 낮추어졌다가, 이듬해 7월 군공을 바탕으로 다시 친왕(親王)에 봉해졌다. 1643년 홍타이지가 죽자, 그의 큰아들로서 숙부인 도르곤·도도 등과 대립하였으나, 자신의 어린 동생 푸린을 순치제로 등극시켰다(『인조실록』 21년 9월 1일). 이듬해 3월 섭정왕 도르곤은 경쟁자들이 호오거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호오거의 봉작을 추탈하였다(『인조실록』 22년 4월 14일).

호오거는 봉작이 없는 상태에서 종군하여 산해관(山海關)에 들어갔고, 청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이후 다시 숙친왕으로 봉해졌다. 1646년 1월 정원대장군(靖遠大將軍)에 제수되어 사천으로 출정하여 같은 해 12월 장헌충(張獻忠)의 정권을 무너뜨린 뒤, 1648년 2월에 경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오거는 귀환과 동시에 도르곤의 견제를 받아 봉작을 삭탈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그해 4월 옥중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40세였다.

상훈 및 추모

1648년 3월 도르곤에 의하여 모든 권한과 명예를 박탈당한 채 유폐되었다가 그해 4월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651년 2월,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호오거는 신원되어 봉작을 회복하였다(『효종실록』 2년 3월 17일). 1656년 9월에는 ‘무(武)’라는 시호를 받아 숙무친왕(肅武親王)이 되었다. 1778년 1월, 건륭제(乾隆帝)에 의하여 태묘(太廟)에 배향되었고, 8월에는 성경(盛京)의 현왕사(賢王祠)에 입사(入祀)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蘇亮, 「淺析淸初多尔衮鏟除豪格集團的斗争」, 『牡丹江敎育學院學報』, 2007年 1期.
  • 王戎笙, 「阿濟格宦海浮沉與淸初權力斗爭」, 『第二屆國際滿學硏討會論文集』(上), 中國社會科學院歷史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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