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원장씨(淑媛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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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6년(중종 1) = ?].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의 후궁. 이름은 장녹수(張綠水)이다. 본관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고,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다. 연산군 대 후반기에 인사권을 갖고 있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연산군의 후궁

장숙원(張淑媛)은 본래 예종(睿宗)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노(家奴)에게 출가하여 자식 하나를 낳은 뒤 가무를 익혀 창기가 되었다. 그 재주를 들은 연산군이 그녀를 발탁하여 총애하며 숙원(淑媛)의 첩지를 내리고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장숙원의 나이는 30대 전후였지만, 매우 동안이었다고 한다.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아양은 견줄 자가 없었고, 연산군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금은주옥(金銀珠玉)·노비·전답·가옥을 하사받았으며, 모든 상벌이 장숙원의 입에 달렸었다고 실록은 전한다.(『연산군일기』 8년 11월 25일)

1503년(연산군 9) 12월 숙용(淑容)에 올랐다.(『연산군일기』 9년 12월 24일) 연산군은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 3월 무명 5백 필을 그녀의 집에 하사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3월 6일) 그녀의 집이 여염집 사이에 있어 화재가 나면 전소가 될 것이라 염려하여 이웃 인가를 헐어 넓히고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새로 신축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10년 3월 8일),(『연산군일기』10년 4월 9일) 이 외에도 연산군은 장숙원에서 노비를 내려주고(『연산군일기』 10년 6월 10일) 논·쌀·면포·후추 등을 하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선물을 내려주었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1일),(『연산군일기』 12년 1월 21일),(『연산군일기』 12년 1월 20일),(『연산군일기』 12년 2월 10일),(『연산군일기』 12년 2월 14일) 또 장숙원의 집에서 무역하는 행위를 허락하고(『연산군일기』 12년 4월 12일) 각종 세금을 감면해주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5월 12일),(『연산군일기』 12년 8월 2일) 뿐만 아니라 1506년(연산군 12) 윤천동(尹千同)이라는 자가 장숙원이 산 집을 빼앗자, 연산군은 그를 장100대, 도(徒) 3년에 처하는 엄벌을 내린 적도 있었다.(『연산군일기』 12년 8월 1일) 연산군은 장숙원의 사가에도 함께 나아가 그녀의 어미를 어머니라 부르고 장숙원은 그 옆에서 태연히 말하고 웃으며 지냈다고 한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15일)

이러한 내용은 연산군이 얼마나 장숙원을 총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실각함과 동시에 장숙원은 왕을 미혹시키고 당시 모든 화근의 근본으로 지목되어 그해 9월 2일 참수형에 처해지고 모든 가산은 적몰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

묘소와 후손

장숙원의 묘는 알려지지 않는다.

장숙원은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는데 이름이 이영수(李靈壽)라고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김범, 『연산군』, 글항아리, 2010.
  • 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연산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