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修學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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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각급 학교가 실시하기 시작한 과외활동으로, 철도의 부설과 함께 원거리로 수일에 걸쳐 다녀오는 과외활동.

개설

소풍과 수학여행은 학교를 벗어나 자연을 벗 삼으며 때로는 다양한 문화시설 및 산업시설을 견학하면서 학습과 앎의 지경을 넓혀가는 과외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하루에 다녀오는 소풍과 달리 보다 원거리로 확장되어 숙박을 동반할 경우 수학여행이라 부를 수 있다. 철도 부설과 함께 원거리 여행이 친숙해지면서 근거리 위주의 소풍 또는 ‘원족(遠足)’이 분화되어 수학여행으로 확대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수학여행단이 방문한 장소는 크게 근대 시설물과 고적으로 나뉘는데, 수학여행을 통해 대한제국기 각급 학교는 개화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대한제국기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실시한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통감부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기차 승차권을 할인받았다. 수학여행이 발달하면서 여관업이 발달하기도 했고, 이는 다시 원거리 수학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내용 및 특징

1912년 4월에 왕세자 영친왕은 재학 중이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수학여행에 참가하였다.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토노사와[塔之澤], 토치기현[栃木縣]의 아시유[蘆湯], 시즈오카현[靜岡縣]의 미시마[三島], 슈젠지[修善寺], 누마즈[沼津] 등을 거쳐 4월 27일 도쿄 별저로 돌아왔다(『순종실록부록』 5년 4월 22일). 이 소식을 접한 순종황제와 황후는 원행으로 인한 건강을 염려하며 각종 물품을 보내 치하하고 학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4월 27일). 1913년 4월에도 영친왕은 수학여행으로 치바현[千葉縣] 일대를 다녀왔다(『순종실록부록』 6년 4월 14일). 매년 4월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소풍과 수학여행은 학교를 벗어나 자연을 벗 삼으며 때로는 다양한 문화시설 및 산업시설을 견학하면서 학습과 앎의 지경을 넓혀가는 과외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하루에 다녀오는 소풍과 달리 보다 원거리로 확장되어 숙박을 동반할 경우 수학여행이라 부를 수 있겠다. 소풍의 경우 화류(花柳)나 원족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수학여행은 별칭이 따로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뒤에 철도 부설과 함께 원거리 여행이 친숙해지면서 근거리 위주의 소풍 또는 ‘원족’이 분화되어 수학여행으로 확대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변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1년(광무 5) 『황성신문(皇城新聞)』 7월 26일의 기사였으나, 이는 블라디보스톡동양어학교[海蔘威東洋語學校]의 한어연구생(漢語硏究生)의 수학여행을 보도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광무 6) 11월 16일에 관아의 통지문인 포달(布達) 제90호 ‘궁내부관제 중 수민원(綏民院) 증치건’을 공포했는데, 그 제1조에 ‘본원(本院)에서는 정당한 직권(職權)을 장(將)하여 본국 인민이 수학유람 급(及) 농공상업으로 외국에 여행하는 자에게 여행권(旅行券)을 선출(繕出)하되 해(該) 여행자에게 관한 방한(防限)도 엄정할 사’라고 되어 있어 수학유람을 언급하고 있다(『고종실록』 39년 11월 16일). 수학유람을 수학여행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때의 수학유람은 문맥상 공무원들의 해외연수 또는 유학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일 것 같다.

한편 일본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887년(명치 20) 4월 20일 『대일본교육회잡지』 제54호에 게재된 ‘나가노현[長野縣] 사범학교생도수학여행’이었으며, 교육법령상으로는 1888년 8월에 제정된 ‘심상사범학교설비준칙’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06년(광무 10) 9월 1일 공포된 대한제국 학부령 제20호 사범학교령시행규칙에는 시험과 수학여행 일수는 교수 일수에 산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학부령 공포 이후 수학유람이라는 용어가 수학여행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학교 단위의 수학여행도 보통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학여행 실시의 제도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1899년(광무 3) 경인선, 1904년(광무 8) 경부선, 1906년 경의선 등 철도가 차례로 개통되면서 수학여행의 대상 지역 또한 확대되었다. 근거리를 위주로 하던 ‘원족’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조선 내 명승지나 도시를 주요 코스로 하는 수학여행이 본격화된 것이다. 대표적인 수학여행지는 서울·인천·수원·평양·개성 등지였는데, 이들 도시에서 학생들이 방문한 장소는 서울은 뚝섬(원예모범장, 수원지공영장)·탑동공원·통감부·경복궁·창덕궁·각급 학교, 인천은 등대·측후소·주안 제염장, 개성은 삼정·유명 고적, 수원은 권업모범장 등이었다. 수학여행단이 방문한 장소는 크게 근대시설물과 고적으로 나뉘는데, 수학여행을 통해 대한제국기 각급 학교는 개화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제국기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계획하거나 실제로 실시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08년(융희 2) 각 보통학교 연합과 1909년 법관양성소의 일본 수학여행의 경우 통감부 철도 당국과의 교섭을 통하여 기차 승차권을 할인받기도 했다. 수학여행의 기간이 늘어나면서 수학여행단이 숙박할 수 있는 장소로 여관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이는 원거리 수학여행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1909년 12월 학부에서 내린 훈령에 의하면, 수학여행에서는 특히 철도운임과 숙박비용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학교에서 여행비를 지원한 경우도 있었다. 한성사범학교의 경우 1909년 일본 수학여행비를 학교예산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와는 달리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오기도 했다. 1909년에 이루어진 시마네현[島根縣] 제일중학교나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의 수학여행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0월 26일자에는 서울 거류 일본인 소학교 학생들의 중국 안동현 수학여행 기사가, 1910년(융희 4) 5월 15일자에는 일본야마구치현[山口縣] 고등상업학교 생도 80여 명의 서울 수학여행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수학여행이 본격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수학여행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만, 그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12년 12월 10일 부산부청(釜山府廳)에서 관내 학교의 수학여행을 단속하기 위해 내린 통첩은 과다한 경비와 수학여행의 부실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통첩에는 경비 조달을 위해 학부모나 기타 관계자들로부터 특별 기부금이나 기부품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비싼 경비에 걸맞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등이 드러나 있다. 학생들과 학교장들 사이에 수학여행에 대한 찬반 논쟁과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끊이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이 실시되었고, 조선교육령 또한 개정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한다는 취지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교육이념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교가 늘어났다. 일정은 보통 12일 정도로 주요 코스로는 시모노세키[下關]-오사카[大阪]-교토[京都]-나라[奈良]-도쿄[東京]-닛코[日光]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수학여행단은 경부선을 타고 증기선으로 갈아타 일본에 도착했다. 주로 할인이 적용되는 3등실 객석을 이용했다. 한국 학생들이 방문한 도시들은 일본 근대화와 일본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한국 학생들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의식 함양과 동화를 기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남긴 기행문 중에는 일본의 발전 양상 및 문화에 대한 동경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억압된 조국의 실제를 돌아보는 근대적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주로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공황의 여파로 수학여행이 축소되었다. 1932년 3월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다시 수학여행이 장려되었고, 만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만주 수학여행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30년대 중반부터 변화를 맞이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다시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나거나 만주로 가더라도 봉천, 여순, 대련 지역에만 들렀다. 한국인 항일 무장 세력 문제는 일제와 만주국의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불안 요소였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래로 전시체제가 성립하자 일본은 기존의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1938년 3월 3일에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은 ‘실기와 실제 능력을 습득시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목을 양성’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였다. 1938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가 각도 도지사에게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근로보국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하면서 근로 동원이 시작되었음은 이를 대변한다. 태평양전쟁기인 1943년 3월 공포된 제4차 조선교육령은 ‘황국의 도(道)에 기초한 국민의 연성(鍊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학교교육을 군사교육화하고 학교는 전시동원의 장으로서 그 역할이 변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교육방침의 변화는 수학여행이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성고등학교는 “1942년부터 모든 수학여행이 중단”되었으며 경북여자고등학교는 수학여행이 “1943년 5월을 고비로 대동아 전쟁의 긴박한 정세와 수송 난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고 금정산 행군으로 바뀌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전시체제가 시작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 이들의 학교 수업과 수학여행의 빈자리는 당시 증가되고 있던 활동인 행사 동원, 근로 동원, 군사훈련 등으로 메워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엄성원, 「일제강점기 수학여행의 양상과 성격」,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9.
  • 조성운, 「1920년대 수학여행의 실태와 사회적 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42, 2012.
  • 조성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수학여행」, 『한일민족문제연구』23, 2012.
  • 조성운, 「대한제국기 근대 학교의 소풍·수학여행의 도입과 확산」, 『한국민족운동사연구』70,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