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충사(酬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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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에 있던 서산휴정(西山休靜)의 사당.

개설

수충사(酬忠祠)는 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 경내에 있는 서산(西山) 대사(大師) 휴정(休靜)의 사당이다. 1794년(정조 18)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표충사(表忠寺)가 건립된 것을 계기로 묘향산의 원적암(圓寂庵) 승려들이 발의하여 수충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수충사는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도 존속하였고,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연원

평안북도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 경내에 있는 수충사는 조선시대 서산 대사 휴정을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수충사의 건립은 1794년(정조 18)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휴정을 모신 표충사(表忠祠)가 건립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휴정이 은거한 묘향산의 원적암(圓寂庵) 승려들이 발의하여 표충사가 세워진 그 해에 수충사를 건립한 것이다. 당시 수충사는 평안도관찰사이병모의 요청에 의해 조정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고, 토지(祭位田)를 지급받았다(『정조실록』 18년 3월 16일).

서산 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묘향산에서 선조의 요청을 받고 전쟁터에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휴정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에게 구국(救國)에 앞장설 것을 호소하고, 직접 문도 1,500여 명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지휘하여 명군(明軍)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휴정의 호소에 호응하여 관동 지방에서 사명유정(四溟惟政), 호남 지방에서 처영, 공주 지방에서 영규, 진주 지방에서 해안 등이 승병을 일으켜 각각 전쟁에 나섰다. 당시 휴정의 호소에 힘입어 전국의 승병의 수는 수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조는 휴정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지만, 휴정은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휴정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한 채로 85세(법랍 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휴정이 입적한 후 묘향산 보현사에 수충사가 세워지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변천

수충사 현 건물은 1794년(정조 18)에 건립한 것으로, 정문인 충의문을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사당의 본전인 영당(影堂)이 있고 남쪽에 비각(碑閣)이 있다. 다른 건물은 일제시대에 수재(水災)로 사라졌다고 한다.

수충사의 본전에 해당하는 영당은 정면 3칸(10m), 측면 2칸(5.6m)의 맞배집이다. 영당 안에는 서산 대사와 함께 활동한 사명 대사 유정, 처영(處英)의 초상화가 있고, 서산과 사명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자그마한 겹처마 합각지붕집인데 5포의 두공을 얹고 용두 조각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수충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유일하게 남은, 승려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중기 이후 사당 건물의 면모를 보여주는 건축 유물이다.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상영, 「청허 휴정의 사문상과 표충사 제향의 의의」, 『한국선학』33, 한국선학회, 2012.
  • 김충일, 「평양성 탈환주역 서산대사의 임진왜란 항쟁」, 『향방저널』18, 향토방위연구소,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