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군(守禦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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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을 개축하면서 창설한 수어청(守禦廳)의 군인.

개설

수어군은 1626년 창설한 수어청의 군인으로, 경청(京廳)과 남한산성청에 소속되었다. 수어사는 광주유수(廣州留守)의 수어사가 겸임할 것인지, 아니면 별도로 수어사를 파견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몇 차례 변화하다가, 1795년(정조 19) 광주유수의 수어사 겸임으로 확정되었다. 남한산성 소속 수어군은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7월에는 경기도와 원주·안동·대구 3읍 소속 12,700명이었고, 1663년(현종 4) 4영(營) 3부(部)로 개편되면서 약 2만 명으로 증가하고 승군(僧軍)도 추가되었으며, 1704년(숙종 30) 이후 3영 2부 체제로 운영되었다. 수어군은 도성의 남쪽 외곽 방어와 왕의 피신처로 활용될 남한산성의 방어를 담당하였으며, 경비는 2,000여 결의 둔전에서 걷는 세금과 복무하지 않는 군관 등에게 징수하는 쌀·포(布) 등으로 마련하였다. 수어군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통해 도성 주변에 임시 작전 본부와 임시 수도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안전한 요새 지대, 즉 보장지(保障地)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의 수축을 완성하였고, 광주읍치(廣州邑治)를 남한산성으로 옮긴 다음 광주목사로 하여금 남한산성의 방어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유사시 남한산성 소속 경기도 군인에게는 수어사가 남한산성에 나가 수령·장관과 함께 결정한 장소를 방어하도록 하였고, 원주진·안동진·대구진 군인에게는 종사관을 보내 명령에 신속하게 따르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4년 7월 15일).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남한산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안동진·대구진 군인을 대신하여 충청도 충주진·청주진 군인을 소속시켜(『효종실록』 2년 6월 3일), 유사시 신속하게 남한산성의 방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1795년(정조 19) 별도로 임명된 수어사와 경청을 혁파하고 광주유수로 하여금 남한수어사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재정을 절감하려는 측면과 함께 수어사를 남한산성에 항상 머무르게 하여 위급한 때를 더 잘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수어군은 도성의 남쪽 외곽 방어와 왕의 피병소(避兵所)로 활용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수어군은 치안 유지도 담당하였는데,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 따르면 남한산성 소속 토포군관 998명 중 18명은 성내에 머무르면서 산료(散料)를 받으며 도둑을 체포하거나 천주교도를 색출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변천

1626년 남한산성이 개축되면서 수어청이 창설되고, 같은 해 광주읍치를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목사에게 남한산성방어사를 겸임시켰다는 점에서 광주의 군인이 우선 수어군에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7월에는 남한산성에 경기도와 원주진·안동진·대구진의 군인 12,700명이 수어군에 편성되었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 남한산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안동진·대구진 군인을 대신하여 충청도 충주진·청주진 군인이 수어군에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1651년(효종 2) 충청병사 휘하에 군병이 없다고 하여 청주진 군인은 죽산진 군인으로 교체되었지만(『효종실록』 2년 7월 26일), 회양진 군인 등이 추가되어 1656년 수어군은 ‘광주·죽산·양주의 경기 3진, 원주·회양의 강원 2진, 충주의 충청 1진’ 등 6진 체제로 운영되고 군인의 수도 16,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충주진 군인은 이완(李浣)이 수어사일 때 조령(鳥嶺) 지역의 방어를 위해 충청도로 환속되었지만, 1663년(현종 4) 광주·양주·죽산·원주 4영의 속오군 11,009명, 아병(牙兵) 1,887명, 수어군 4,440명과 좌부·우부·중부 3부의 1,000여 명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남한산성의 수어군은 약 2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승군도 추가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1704년(숙종 30) 수어군은 3영 2부 체제로 개편된 후, 폐지될 때까지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다.

수어군의 최고 지휘관인 수어사와 경청은 국가의 재정 부담, 군사력 강화, 민의 고통, 당쟁 등과 관련하여 1683년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임한 후 몇 차례 변화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정조 19) ‘남한산성을 설치한 것은 그곳을 보장(保障)으로 삼아 위급한 때를 대비하려는 것인데 수어사는 거의 서울에 있으므로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고, 경영 800명의 표하군은 재정을 크게 축내면서 경기도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이유로(『정조실록』 19년 8월 19일), 수어경청을 혁파하고 광주유수가 남한수어사를 겸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수어군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계초존안(啓草存案)』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 관계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서태원, 「조선 후기 광주의 군사 지휘 체계 변천」, 『역사와 실학』29, 2006.
  • 이현희, 「조선 남한 축성 여측(蠡測)」,『사총』7, 1962.
  • 차문섭, 「수어청 연구(상)」, 『동양학』6, 1976.
  • 차문섭, 「수어청 연구(하)」, 『동양학』9,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