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군(修理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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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나 관아 시설을 수리하는 일에 동원된 역군.

내용

수리군(修理軍)은 궁궐이나 각급 관아의 영건이나 수리의 역사에 동원된 역군이었다. 궁궐·관아의 영건·수리에는 흔히 요역농민인 연군이 징발될 수 있었다. 국초 이래 한양 신도(新都) 건설의 일환으로 궁궐 및 기타 부대시설의 영건이 거듭되는 가운데 민정의 부역이 빈번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궁궐의 영건은 왕실의 권위를 안팎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규모의 역사에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궁궐의 영건 역사는 도성 내에서 진행되었으므로, 부역승군의 징발은 곧 승도(僧徒)의 도성 출입 문제에 대한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궁궐 영건의 역사에서는 성종대 이후 특히 군인과 연군이 많이 징발되었다. 그러나 1606년(선조 39) 이후의 종묘·궁궐 영건공사에서 모군이 고용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그 뒤의 궁궐 영조공사에서는 거의 연군이 사역되지 않았다. 단지 잡역 수행을 위한 단기간의 요역 징발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도성 내의 사정과 달리, 지방군현의 영건 역에서는 17세기 이후에도 요역노동의 징발에 의존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군현의 관아 건물이나 공적 시설물을 때맞추어 수선하는 일은 수령의 일상적인 업무 가운데 속하였기 때문이다. 영건 역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일개 군현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에는 감사에 보고하고, 그 지원 아래 가까운 군현의 연군을 함께 요역노동에 징발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지방군현의 영건 역에서 연군을 장기간에 걸쳐 징발 사역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대체로 단기간 노역이었고, 무상의 강제노동이라는 부역노동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관에서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리군은 징발 역군인 경우도 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모군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수리군은 참여한 역사의 종류에 따라, 빙고수리군(氷庫修理軍)·역수리군(驛修理軍)·대내수리군(大內修理軍)·경복궁수리군(景福宮修理軍)·인정전수리군(仁政殿修理軍)·사섬시수리군(司贍寺修理軍) 등으로 불렸다.

용례

御晝講 上謂李克培曰 氷庫修理軍八百 無乃太多乎 欲量減之 克培對曰 臣亦以謂太多 上遣注書 往審功役 命減三百 (『성종실록』 5년 9월 17일)

참고문헌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