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희(宋時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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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34)∼1627년(인조5) = 27세]. 조선 중기의 유일.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송갑조(宋甲祚)이고,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맏형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5) 관서(關西) 지방을 유람하던 중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후금(後金)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서 평안도 지방을 침범해 들어왔는데, 3월 6일 갑자기 후금 군사 수천 수백 기(騎)를 만나게 되자, 그는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아버지 송갑조는 사옹원 봉사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다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나라’로서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회덕에 돌아와서, 아들의 비보(悲報)를 듣고 사람들을 모아 평안도로 직접 가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어 고향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의 부인 안동김씨는 김성진(金聲振)의 딸인데,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가 같은 해 11월 29일 남편을 따라서 죽으니, 합장(合葬)하였다. 아버지 송갑조도 맏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병석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4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때 송시열은 20세의 나이였는데, 맏형 내외와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청(淸)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고, 이는 후일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항상 맏형 내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겼던 송시열은, 후일 정승이 되고 나서 손수 비문을 지어서 무덤 앞에 세우고 애도하였다.

성품과 묘소

송시희는 장건(壯健)하고 기백과 절의가 있었으며, 사람을 아끼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저자산(楮子山)의 선영에 있는데, 셋째 동생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1797년(정조21)에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典)』
  • 『간이집(簡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