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損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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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나 가뭄·병충해 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작물 작황에 피해가 발생한 경작지.

개설

전통시대 농업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고, 이에 따라 흉작이 잦았다. 이러한 조건은 수취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전기에는 작황 정도에 따라 세액을 달리 부과하는 정률세(定率稅)를 운영하였는데,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과 공법(貢法)이 그러한 세제이다. 답험손실법은 관리가 직접 경작지를 답사하여 실제 작황 상태를 파악한 뒤에 등급을 매겨 그에 따라 정해진 세액을 부과하는 제도였다. 공법은 답험손실법의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폐해를 보완하기 위하여 등장하였는데, 각 도별로 토질을 나누고, 모두 27종으로 토지 등급을 나눠 세액을 부과한 제도였다. 이들 제도에서는 홍수나 가뭄 등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작지를 손전(損田)으로 파악하고, 토지의 작황 정도에 따라 세액을 감면해 주거나 혹은 전액 면제해 주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국가가 손전을 파악하여 그에 대해 세액을 감면하거나 면제하는 조치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흉작에도 과도한 세액을 부과할 경우 백성들은 결국 토지로부터 이탈하여 유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고려말은 조세 체계의 혼란으로 과중한 수취가 행해져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러한 폐단에 대한 시정 조치로 전제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내용 중 하나로 손실이 발생한 토지에 대한 세액감면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조선건국 이후 그대로 계승되었고, 공법이 도입될 때에도 연분9등제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내용

고려 공양왕대 최초로 규정된 답험손실법에서는 경작 상황을 10등급으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수취하도록 하였다. 당시 1결 토지의 생산량은 300두로 산정되었다. 작황이 전혀 피해 없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300두의 1/10인 30두를, 10%의 손실이 발생하였을 경우 9분실(分實)로 파악하여 270두의 1/10인 27두를 수취하였다. 다만 손실이 80% 내지 90%에 이르는 2분실·1분실 토지에 대해서는 과세를 전액 면제하였다.

이러한 답험손실의 내용은 1392년(태조 2)에 한 차례 변화하여, 8분실 이상의 토지에 대해서는 감면 없이 전부 30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후 태종대에는 공양왕 대 규정을 복구하였다. 다만 2분실·1분실 토지에 대해서도 6두·3두를 납부하도록 조치하였다. 태종대 규정은 손실분에 비례하여 1/10을 납부하도록 한 것으로, 손실량에 정확히 비례하여 감면한다는 의미에서 수손급손(隨損給損)이라 부르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5년 8월 1일).

손전에 대한 세액 감면은 세종대 도입된 공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공법은 1결당 생산량을 400두로 결정하였고 세액은 그 1/20로 정하였는데, 해마다의 풍흉을 9단계로 나누어 수세하였다. 그에 따라 손실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상상(上上)년은 20두,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한 하하(下下)년은 4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변천

공법이 도입된 이후 16세기부터는 점차 전세가 하향 고정화되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토지 1결당 4두 수취가 보편화되어 갔다. 이러한 관례는 인조대 들어 영정법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손전은 그 제도적 의미를 상실하였다. 조선후기에도 작황 정도를 고려하여 세액을 달리 부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중엽부터 전세를 군현 단위로 수취하는 비총제가 시행되면서 개별 필지의 작황을 판단하여 손전으로 취급하는 전기의 수취 방식과는 차이를 보였다.

참고문헌

  • 강제훈, 『조선초기 전세제도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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