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孫子兵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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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 출신 병법가(兵法家) 손무(孫武)가 지은 병법서(兵法書).

개설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 출신의 병법가(兵法家)이자 전략가인 손무(孫武)가 지은 대표적인 병법서(兵法書)다. 내용은 1편 ‘시계(始計)’, 2편 ‘작전(作戰)’, 3편 ‘모공(謀攻)’, 4편 ‘군형(軍形)’, 5편 ‘병세(兵勢)’, 6편 ‘허실(虛實)’, 7편 ‘군쟁(軍爭)’, 8편 ‘구변(九變)’, 9편 ‘행군(行軍)’, 10편 ‘지형(地形)’, 11편 ‘구지(九地)’, 12편 ‘화공(火攻)’, 13편 ‘용간(用間)’ 등 총 13편의 구성을 통해, 군사(軍事) 운용의 기본적인 원칙부터 실전에 응용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전술까지 풍부한 내용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중국 병가(兵家) 사상의 진수를 담은 책으로 널리 애독되고 있다.

『손자병법』은 손무가 오나라 행을 택하면서, 오나라 왕 합려에게 바친 전쟁 철학서라 할 수 있다. 손자병법의 기저에 깔린 사상은 백성과 군사에 대한 사랑, 즉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절대 위태로움이 없다.” 그는 필승 사상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전승(全勝) 사상을 외치는 철학자였다. “내 병사가 죽고 다쳐서 이기는 싸움은 50점이요, 내 병사는 물론 적국의 병사까지도 온전하게 다치지 않고 이기는 것을 100점이라 했다.”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 묘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손자병법』 13편이 출토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동행되던 송본과 같다. 그밖에 오문(吳問)ㆍ황제벌적제(黃帝伐赤帝) 등의 중요한 유실문이 있다.

구성/내용

『손자병법』의 원래 이름은 『손자(孫子)』ㆍ『오손자병법(吳孫子兵法)』ㆍ『손무병법(孫武兵法)』 등으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말 손무(孫武)가 지었다.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82편, 도록 9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송본(宋本)에는 계(計)ㆍ작전(作戰)ㆍ모공(謨攻)ㆍ형ㆍ세(勢)ㆍ허실(虛實)ㆍ군쟁(軍爭)ㆍ구변(九變)ㆍ행군(行軍)ㆍ지형(地形)ㆍ구지(九地)ㆍ화공ㆍ용간(用間) 등의 13편만이 전해진다.

이 책은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 그리고 세계 최고(最高)의 병법이기도 하다. 이 책은 기원전 6세기경, 병법가인 손무(孫武)가 썼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국인은 책 제목에 저자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손무는 오(吳)라는 제후국의 무장이었다. 당시 중국은 춘추 시대(春秋時代)라 불리는 시기였다. 주(周) 왕조의 권위가 쇠퇴하고 제후들이 패권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탓에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오나라는 장강(長江)의 남쪽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원(中原) 제후들은 그곳을 오랑캐의 땅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손무가 오나라에서 활발하게 군사 활동을 시작하여 남쪽의 웅(雄)ㆍ초(楚)를 멸망 직전에까지 몰고 갔다. 이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손무의 공적이라 전해진다. 손무는 이 시기에 병법서를 오왕(吳王)에게 바쳤다. 이것이 『손자』의 원형이 된 책으로 여겨진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몇 개의 문장이 빠지거나, 첨가된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삼국 시대(2세기 말~3세기 초)에 위(魏)의 태조조조(曹操)가 『손자』의 자료를 모아 정리했다. 그 후 조조가 편찬한 스타일에서 거의 변화 없이 후세까지 전해져온 것 같다. 이것이 현재에도 볼 수 있는 『손자』 13편이다. 다만 1997년에 56편으로 이루어진 『손자』의 죽간이 발굴되어 현재 해석 중에 있다고 한다. 이 해독이 끝나면 『손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손무는 지금으로 부터 2,500년 전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의 전환기에 살던 군사 철학자이다. 전쟁이란 국가 간의 갈등 해결 방식의 한 종류이다. 당시는 천자의 권한이 약해지면서, 같은 부모로 부터 땅을 나누어 가진 귀족(제후국)들 간의 갈등이 심해졌고, 전쟁이 빈번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귀족들에겐 규칙이 있는 게임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령 전쟁을 하러 갔다가 적국에 흉작이 들어 민중이 굶고 있으면, 전쟁을 하지 않고 돌아 왔으며, 한번 넘어진 적병을 찌르지 않았으며, 흰 머리가 있는 적병은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귀족들 사이에 불문율로 정한 규칙으로 귀족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한 것이지, 적국의 민중들과 군사들을 아끼고 사랑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군사들은 그냥 장기판의 졸(卒) 하나에 불과한 그냥 부품과도 같은 존재였다. 영화에서도 많이 보았던, 아군과 적군이 평지에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싸우는, 숫자가 많으면 이기는, 전략도 전술도 없는 그런 전쟁, 이것이 손무가 태어났을 때의 시대적 배경이다.

손무는 자신이 태어난 중원 (황하강 유역) 의 제나라(지금의 산동성 지방)를 떠나, 변방의 오나라 (지금의 상해 지방)로 가서 최고 군사를 지낸 사람이다. 제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손무는 제나라에서 충분히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7 세 어린 나이에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오나라왕 합려에게로 간다. 그는 거기에서 합려에게 이 책을 지어서 바쳤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춘추 말기의 군사학설 및 전쟁경험을 모두 묶은 책이지만, 우세한 병력의 집중, 민첩한 기동작전 등의 수많은 기본원칙은 세계 각국 군사가들의 높은 평판을 얻었다. 조조(曹操)를 포함한 11명이 주를 달았으며, 영어ㆍ일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ㆍ체크어ㆍ러시아어ㆍ한국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참고문헌

  • 김현기, 「이순신 제독의 전략ㆍ전술과 손자병법」, 『이순신연구논총』 4호(봄ㆍ여름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5.
  • 이영국, 「태권도 손자병법」, 『한국스포츠교육학회보』 제37호, 한국스포츠교육학회, 2005.
  • 이중희,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손자병법의 전쟁 성격 비교 연구」,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7.
  • 조동성ㆍ은종현, 『손자병법과 경영전략』,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경영연구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