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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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문관 시험을 거쳐 등용된 관원으로, 관공서에서 판임문관의 실무를 전담하던 하급(下級) 보조 문관(文官).

개설

속(屬)은 일본 근대 시기 각 관청에서 업무를 담당하던 판임관 지위의 하급 보조 문관이었다. 이는 대한제국은 물론 조선 전래의 체계에는 없던 새로운 관직으로, 일종의 하급 문관이었다. 무관직에서는 속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경우 한품서용(限品敍用)의 관원이라고 하겠다. 해당 실무를 전담하고 그 직무에서 문관 임용 연한을 마치는 직을 의미한다.

일본의 관직은 메이지[明治] 유신 전후로 크게 변화하였다. 메이지 이전에는 쇼군[將軍]을 중심으로 한 사무라이 관료 체제였다면, 이후 시험을 거쳐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 관료 체제로 바뀌면서 속이 나타났다. 물론 메이지 이전 일본사에서도 속의 관료적 성격은 나타난다. 예컨대 고대 일본의 속은 율령제(律令制)에서는 방(坊), 직(職), 요(寮) 다음의 네 번째 관직이었다. 일본 근대의 속이 율령제 시대의 속과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속이라는 용어가 일본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속이라는 용어의 하급 관원은 나타나지 않는다.

1887년(고종 24) 7월 23일 ‘문관시험시보급견습규칙(文官試驗試補及見習規則)’이 발령되었다. 이전의 문관 임용은 대개 정실(情實) 임용이 많았지만 이 규칙에 따라 관리임용은 시험, 학력, 경력 등의 심사에 따라 이뤄졌다. 관리의 임용을 능력 위주로 선발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당시 관리는 일반 신민과는 차별되어 천황의 정부에 종사하는 직책이었다. 속은 시험 등의 공정한 기준을 거쳐 관원을 선발하였다.

1893년(고종 30) 일본에서 공포된 지방 관제에 의하면, 속은 상관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하는 직책이었다. 또한 1924년 8월 12일 공포된 각성관제통칙(各省官制通則)에는 판임문관으로 서무에 종사하는 자들의 총칭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는 문관임용령(文官任用令)이 공포되어 판임관의 임용 제도가 크게 변한다. 이후 만들어지는 문관보통시험은 판임관이 되는 시험이었다. 반면 판임관 이상이 되는 문관은 고등문관시험이 있었다.

한국에 일본 관원들이 도항하는 것은 공사관을 비롯한 일본 외교관사가 설립된 이후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진출에 발맞추어 일본인 관원들은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지화에 참여하기 위해 도항했다. 더욱이 1906년(광무 10)에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 일본인 관원들이 대거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통감부 설치와 동시에 일본인 고문들은 통감의 감독으로 귀속되어 보좌관이나 교관 등의 명칭으로 궁내부와 의정부의 각 부에 배속되어 한국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 일제의 정치, 군사적 강압에 의한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 관료의 본격적인 조선 통치가 시작되었다. 식민지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일본인 관원들이 주도하는 관서였다. 관원은 정책을 입안하거나 조정하는 고위직만이 아니라 정책을 직접 시행하고 지시하는 하급 관원까지도 아우른다. 총독부에 소속된 관원은 대부분 문관이었으며, 문관직의 하급 관원 중의 하나가 속이었다.

내용 및 특징

판임관인 속은 일본 천황의 관원 임명대권을 형식적으로 위임받았던 각 행정관청에서 임명하였다. 이들은 국가공법상 관리로 지위는 1등에서 4등까지 구분되었다. 속은 시험을 거쳐 임용되는 직책이었으나, 특정한 경력과 학술적 지능을 가진 경우에도 임용 후보가 되었다.

문관임용령 제2조 3항에 따르면 관공립중학교 또는 동등 이상을 인정하는 관공립학교를 졸업하면 판임관으로 임용될 자격이 주어지고, 제국대학 등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는 판임관견습에 임명되었다. 한편 군대의 경우 기술적인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나 잡무적인 일상의 사무를 담당하는 것이 속이었는데, 이들을 군속이라고 불렀다.

군속에 속하는 기술계 문관은 기수(技手)이다. 기사(技師)는 고등 문관이었다. 기수는 육군성과 해군성 등의 기관과 각 학교, 무기 공창과 연구소, 혹은 일선 부대의 비행장과 해군모항 기지 건설 등에 배치되었다. 1937년 판임문관인 기수는 1,079명이었다. 당시 문관 총수가 2,766명이었으므로 약 48%가 속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이 군비를 확충함에 따라 군속도 계속 증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육군조병창(陸軍造兵廠)에서는 기술직 군속의 확보를 위해 고등소학교 출신의 공원(工員)들에게 학과 교육과 기술 교육을 시행하여 3년간의 교습 기간을 수료하면 정식으로 채용한 뒤 군속인 하급 문관은 물론 고등 문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국가시험 체제를 통해 신분을 상승하고 싶은 일반인에게 하급 문관, 즉 속이 되는 것은 고등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기도 하였다. 물론 고등 관료로 채용될 확률은 1% 미만이었다.

1935년에는 육군과 해군 모두 동일하게 군속의 양성을 위한 견습 제도를 갖추었다. 물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을 공격하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군속의 지위가 더 좋아졌다. 예컨대 1942년 기사는 고등관 7등이면서 중위에 상당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승진의 가능성이 높아져서 고등관 2등이며 소장에 해당하는 칙임기사(勅任技師)가 될 수도 있었다. 이외에 고원(雇員)으로 일정한 기간 근무하여 그 직무를 인정받은 경우에도 속으로의 승진이 가능했다.

이왕직에 소속된 속에서도 위와 동일한 양상의 모습이 보인다. 이왕직에서 시행한 각종 사업이나 동물원과 식물원, 목장과 같은 특수한 기예나 기술이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속이 배속되었다. 1911년 2월 1일부터 시행된 궁내성령 제16호에는 이왕직 직원인 판임관의 정원과 이왕직 속 90인, 전사보 25인, 전의보 7인, 기수 9인이 지정되었다. 궁내성령 제17호에는 고종이 거처하던 덕수궁 즉, 이태왕부에 이왕직 속 20인과 전의보 2인이 배속되었고, 영친왕이 거처하던 왕세자부에는 이왕직 속 2인과 전의보 1인이 소속되었으며, 이강공 등의 공족에게는 이왕직 속 각 5인을 분속시키도록 하였다. 동시에 발표된 궁내성령 제18호는 이왕직에 판임 대우의 참봉 75인을 두며 능침의 관리와 수호 및 제사에 종사하도록 했다(『순종실록부록』 4년 2월 1일)

변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 관제가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속은 사라졌다.

참고문헌

  • 『창덕궁이왕실기(昌德宮李王實記)』
  • 『王公族錄』
  • 『매일신보(每日新報)』
  •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왕실도서해제』 1,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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