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영장인(屬營匠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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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영문에 속하여 각종 군기와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던 장인.

개설

조선시대 장인(匠人)은 중앙과 지방관아의 수공품을 제작 담당하던 역인(役人)의 일종이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은 장적(帳籍)을 만들어 공조(工曹)·본사(本司)·본도(本道)·본읍(本邑)에서 보존한다.”고 하였는데, 속영장인(屬營匠人)은 지방 감영과 병영 등에 속한 외공장의 하나로 여겨졌다.

1436년(세종 18)에 함길도도절제사김종서(金宗瑞)가 변방의 방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영문(營門)의 위치를 부거성에서 용성으로 옮기자는 보고를 하였는데, “군영에 소속된 장인들은 모두 단천(端川) 이북의 백성들로서 왕래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이들로 하여금 군기를 정련(精鍊)하게 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병영에 속한 장인들은 영문 내에 비치된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맡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속영장인에 관한 기사가 많지 않아 영문에서 이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관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후기 들어 지방의 영문에 속한 장인들은 손쉬운 역인 헐역(歇役)을 지는 자들로 인식되어 영장인(營匠人)에 투속(投屬)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대에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 각영(各營)에서 한가로이 노는 장인의 문안(文案)을 만들어 조사해 보고하고, 도망갔거나 죽어서 생긴 결원을 채우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현종실록』 15년 8월 10일).

담당 직무

조선전기에는 중앙관서와 지방관아에서 각종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는 장인의 정원을 장부에 정해 놓고 각 읍에서 차출하여 역을 지게 하였다. 그리고 결원이 생기면 양인·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임자를 찾아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옹원 소속 사기장(沙器匠)과 같이 전문적인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경우, 자손 대대로 같은 역을 지도록 법전에 명시해 놓았지만, 대다수의 장인은 나이가 60이 되면 대부분 역을 면하는 신역(身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 자체가 군역보다 헐한 역종(役種)인 경우, 세력 있는 자들이 투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장인의 경우도 감영의 각종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다른 역에 비해 역 부담이 덜하여 투속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숙종대에는 각 도 감영에 모속(冒屬), 즉 불법으로 소속된 장인들을 모두 면직시키고 어린아이[兒弱]로 군역에 충정(充定)된 자들로 대신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숙종실록』 7년 11월 11일).

변천

숙종대에 양역 변통 논의가 이어지면서 각 영에 속한 장인들을 혁파하여 군역에 충당시키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영문의 규모가 커지고 행정이 확대되면서 영장인은 조선후기까지 역종이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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