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지희(笑謔之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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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희학을 바탕으로 하는 대사 중심의 화극(話劇).

개설

잡희(雜戱)·창우지희(昌優之戱)·배우지희(俳優之戱)라고도 부르며, 곡예를 중심으로 하는 규식지희(規式之戲)와 구별된다.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로 연말에 행한 의식인 나례(儺禮)와 연초에 대비전을 위해 베풀던 잔치인 진풍정(進豊呈) 등에서 주로 공연되었다. 웃음과 해학에 주안점을 두고, 가면이나 인형 등의 소도구 없이 배우가 특정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대사를 통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1인극이나, 혹은 여러 인물이 각자의 배역을 수행하는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되었다.

내용 및 특징

소학지희(笑謔之戱)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해학과 풍자 및 골계(滑稽)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1527년(중종 22)에 중종은 나례를 행할 때 춤과 노래를 담당한 정재인(呈才人)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질고(疾苦)와 구황(救荒)의 절차 등을 놀이로 연출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중종실록』 22년 12월 23일). 그뿐 아니라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중종 때 한 배우가 정평부사(定平府使)구세장(具世璋)의 탐욕스러움을 놀이로 만들어 풍자한 사실과 함께, 배우 같은 사람도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소학지희가 웃음과 희학을 바탕으로, 당대의 집권층이나 사회 전반의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대사 중심의 화극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소학지희의 전신으로 고려시대의 조희(調戱)를 들 수 있다. 조희는 재담 위주의 놀이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민간의 배우들이, 고려 우왕 때의 권신인 염흥방(廉興邦)의 시종들이 백성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극으로 연출해 공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소학지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문종 때이다. 집현전에서 중국 황제의 명을 맞이하는 복색의 제도에 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규식지희와 함께 소학지희가 등장한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10일). 이후 1464년(세조 10)에는 왕이 왕비와 더불어 사정전에 나아가 나례를 구경하였는데, 이때 역귀를 쫓는 우인(優人)들이 잡희를 통해 서로 문답하면서 관리의 탐오함과 청렴함, 항간의 잡다한 일 등을 모두 들춰내었다고 한다(『세조실록』 10년 12월 28일). 따라서 조선시대 소학지희는 사회 비판과 시사 풍자를 선보이며 본격적인 화극으로 발전해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소학지희는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행사나 외국 사신의 접대 등을 위해 산대도감을 설치하여 재인의 관리와 연희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소학지희는 이러한 산대도감에서 비롯된 산대도감 계통 극의 대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는 『조선왕조실록』 및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 어숙권의 『패관잡기』 등에서 소학지희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소학지희는 연극적인 측면뿐 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역할과 가치 또한 재고해볼 만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패관잡기(稗官雜記)』
  • 『어우야담(於于野譚)』
  • 사진실, 『한국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 이두현, 『한국연극사』, 학연사, 2005.
  • 장한기, 『한국연극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6.
  • 안상복, 「소학지희의 개념과 역사적 전개」, 『고전희곡연구』 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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