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燒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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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나 수수 혹은 잡곡으로 밥을 지어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후 증류한 술.

개설

소주의 주재료는 쌀이나 수수 등의 곡물이다. 한반도의 중남부 지방에서는 쌀로 소주를 빚지만, 북부 지방에서는 수수로 소주를 빚었다. 13세기 이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명된 증류기를 모방하여 세계 곳곳에서 소주와 비슷한 증류주를 빚었다. 증류기는 옹기로 만들기도 했지만, 지방에 따라 솥뚜껑을 사용하거나 나무와 쇠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했다.

먼저 증류기를 솥 위에 건다. 곡물 밥에 누룩을 넣고 밑술을 만든 다음에 이것이 익으면 솥에 넣고 끓인다. 증류기의 위쪽에 차가운 물을 담아 밑술이 끓으면 수증기가 되어 위로 올라가다가 차가운 물을 담은 그릇에 부딪쳐 이슬과 같은 물로 변한다. 이것을 모아 다시 일정 기간 숙성시킨 술이 소주이다. 소주는 밑술로 탁주나 청주를 사용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재료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 만들어진다.

술이 독해 쉽게 취하면서도 깰 때 탁주나 청주에 비해 깔끔하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급 술로 언급되었다. 성종 때까지는 제향에도 사용했으며, 왕이 아끼는 신하에게 선물을 줄 때도 쓰였다. 심지어 조선초기에는 명나라에 진상하는 물품과 쓰시마 섬과 유구국(琉球國)에 하사하는 물품에도 들어갔다. 영조 때 금주령이 내려지면서 소주는 제향은 물론이고 관원들이 마시면 안 되는 술이 되었다.

만드는 법

소주 만드는 법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처음으로 나온다. “쌀 1말을 깨끗이 씻어 익게 쪄 끓인 물 2말에 담가 차거든 누룩 5되를 섞어 넣었다가 이레가 지나거든 고되 물 2사발을 먼저 끓인 후에 술 3사발을 그 물에 부어 고루고루 저으라. 불이 성하면 술이 많이 나되 연기 기운이 구멍 가운데로 나는 듯하고 불이 약하면 술이 적고 불이 중하면 이어져 끊어지지 아니하면 맛이 심히 덜하다. 또 위의 물을 자주 갈아 이 법을 잊지 아니하면 매운 술이 3병 나오니라.”

또 다른 만드는 법도 나온다. “쌀 1말을 깨끗이 씻어 익게 쪄 탕수 2말에 골라 묵은 누룩 5되를 섞는다. 엿새 만에 고되 물 2사발을 먼저 솥에 부어 끓이고 술 3사발을 그 물에 부어 고루 젓고 뽕나무, 밤나무 불을 알맞게 땐다. 위의 물이 따뜻하거든 자주 갈되 한 솥에 새 물을 떠 들였다가 푼 다음에 즉시 부으면 소주가 가장 많이 나고 좋으니라.” 『음식디미방』에는 그 밖에도 밀로 빚은 밀소주, 찹쌀로 빚은 찹쌀소주 만드는 법도 나온다.

왕실에서 사용했던 소주는 주로 여름에 내의원(內醫院)에서 만들어 올렸다[『예종실록』즉위 9월 15일 2번째기사]. 내의원에서 소주를 빚은 이유는 더운 계절에 약용으로 소주를 이용했기 때문이다(『인조실록』 23년 5월 18일).

연원 및 용도

소주는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글의 제목은 「서린(西隣)의 조판사(趙判事)가 아랄길(阿剌吉)을 가지고 왔다. 그 이름을 천길(天吉)이라 하였다[西隣趙判事 以阿刺吉來 名天吉]」이다. 서린은 송도의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있던 양온동(良醞洞)을 가리킨다. 조판사는 고려말의 문신인 조운흘(趙云仡)이다. ‘아랄길’은 아랄길주(阿剌吉酒)로 아라비아어 아라크(Arak) 혹은 아라그(Arag)를 차음한 말이다. 다른 말로 ‘천길’이라고도 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향수를 만들면서 증류기를 발명했고, 그로부터 증류주가 만들어졌다. 칭기즈 칸의 세계 제국 건설을 통해 이 증류기가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갔다. 소주는 탁주와 달리 색이 투명하다. 그래서 이색은 형상이 없다고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의 소주를 두고 백주(白酒)라고 불렀다. 청주를 솥에 넣고 잘 끓이면 솥 위에 얹어 놓은 소줏고리의 주둥이에는 술이 이슬처럼 맺힌다. 이 형상으로 인해 소주는 다른 말로 노주(露酒) 혹은 ‘이슬술’로 불렸다. 이색은 증류한 소주를 한 모금 마시면 마치 왕이 된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선왕의 빈전(殯殿)상식(上食) 때 식사와 함께 소주를 올렸다[ 『예종실록』 즉위 9월 15일 2번째기사]. 상식은 상장례를 마친 이후 빈전을 차려서 하루에 두 번씩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음식을 올리는 의례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영조 이전까지 여름이 되면 약용을 겸하여 소주를 수라상과 함께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여름이 되는 5월 초하루에는 내의원에서 여름의 무더위를 물리치기 위해서 소주나 홍소주(紅燒酒)를 하루 걸러서 왕에게 올렸다(『인조실록』 16년 5월 2일). 홍소주는 소주를 내릴 때 지초(芝草)에 통과시켜 만든 약술이다. 다른 말로 자소주(紫燒酒)라고 했다.

그밖에 명나라와 쓰시마 섬, 그리고 유구국에 보내는 선물로 소주가 쓰였다. 왕은 아끼는 신하들에게도 소주를 선물로 내렸다. 소주는 선물뿐만 아니라 뇌물로도 이용되었다. 소주가 독주임에도 불구하고 더 독하게 하기 위해 고추를 타거나 천초를 타는 경우도 있었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죽는 사람도 생겼다. 그래서 효종은 소주 마시기를 자제하라고 명하기도 했다(『효종실록』 8년 9월 26일). 금주령을 내렸던 영조는 검토관조명겸(趙明謙)이 여항의 백성들에게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도 없다고 알려졌으니 술을 경계하라고 하자 목이 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소주를 마시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라고 했다(『영조실록』 12년 4월 24일).

참고문헌

  • 『목은집(牧隱集)』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