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근진(所斤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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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도 태안군에 설치한 수군의 거진(巨鎭).

개설

소근진은 1467년(세조 13) 충청도 태안군 원서면에 있는 좌도도만호(左道都萬戶)의 진 오근이포가 첨절제사진이 되면서 명칭도 변경된 것이다. 『경국대전』에서 소근진은 종3품 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인 거진으로 확정되어, 제진(諸鎭) 파지도와 당진포의 조련이나 점검을 지휘하였다.

소근진의 건물로는 ‘관사, 군기고, 대변청(待變廳)’ 등이, 전함은 ‘전선(戰船), 방선(防船), 병선(兵船), 복물선(卜物船), 사후선(伺候船)’이, 재정 수입으로는 수군첨사의 급료 등으로 쓰이는 ‘수군전, 결전(結錢), 신선전(新選錢), 둔세미(屯稅米)’ 등이 있었다. 소근진은 왜구와 황당선 등의 침입으로부터 충청도 연해 지역을 방어하면서 조운선의 호송 등을 담당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04년(태종 4) 설치된 충청도좌도도만호의 진 오근이포가 1467년 첨절제사의 진이 되면서 소근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근진은 왜구와 황당선 등의 침략으로부터 충청도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소근진에 앞서 1404년에 설치되었던 오근이포에는, 최고 지휘관인 좌도도만호를 비롯하여 병선(兵船) 11척, 추왜별선(追倭別船) 2척, 무군선(無軍船) 2척, 선군(船軍) 1,400명’이 배치되었음을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1467년 오근이포가 소근진으로 바뀐 후 거진 소근진의 건물로는 ‘관사(官舍), 군기고, 대변청(待變廳)’ 등이 지어졌다. 전함은 ‘전선 1척, 방선 1척, 병선(짐배) 1척, 사후선 3척’이 있었는데, 서문 바깥에 선창(船倉)이 있었다.

군병은 최고 지휘관인 종3품 첨절제사를 비롯하여 ‘대장(代將) 1명, 지구관 1명, 기패관 10명, 교사 2명, 훈도 2명, 포도관 4명, 소기군병(所騎軍兵) 즉 주사군(舟師軍) 323명, 수군 816명, 신선군 86명’이 있다. 재정 수입은 ‘수군전 1,632냥, 수군량결전(水軍糧結錢) 826냥, 신선전 192냥’ 총 2,650냥을 비롯하여 주사군전·병량미(兵糧米)·둔세(屯稅)·어교(魚膠) 등이 있는데, ‘첨사의 급료, 군기(軍器)의 수리, 지필묵(紙筆墨) 구입’ 등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소근진은 황당선(『명종실록』 11년 7월 17일)·왜적·이양선의 침략에서 충청도 연해 지역을 방어하였고, 안흥 관장항부터 수원 풍도(楓島) 앞바다까지 평신진과 1년씩 교대로 조운선의 호송도 담당하였다.

변천

1404년 충청도좌도도만호의 진 오근이포로 설치되어 1467년 첨절제사의 진이 되면서 소근진으로 바뀌었다. 『경국대전』 이후 종3품 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인 거진으로 확정되었다.

소근진은 오근이포에 비해 전함과 군병의 수가 적었고, 임진왜란 이후 소근진의 제진인 파지도와 당진포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해동지도(海東地圖)』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공충수영급각읍진병량미월해량미퇴선가미병록성책(公忠水營及各邑鎭兵糧米越海糧米退船價米竝錄成冊)』
  • 『부역실총(賦役實總)』
  • 서태원, 「조선후기 충청도 평신진 연구」, 『중앙사론』34, 2011.
  • 황의천, 「조선시대 충청수영과 속진의 위치에 대한 연구」, 『보령문화』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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