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歲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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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룻날에 새해 송축과 길상·벽사의 목적으로 그려 문에 붙이거나 선물로 주고받던 그림.

개설

세화(歲畫)는 정초(正初) 세시 풍속의 하나로, 조선초기부터 궁궐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 20세기 초반까지 행해졌다. 조선시대 세화의 주된 수요자는 궁궐의 왕이나 왕족, 그리고 사대부들이었다. 제작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있던 화원들이 담당하였고 제작된 세화는 예조에서 등급을 매겨 일부는 왕에게 진상되었으며, 일부는 봉상시(奉常寺)를 통해 근신들에게 하사되었다. 그림의 내용은 액막이용으로 금갑신장(金甲神將), 직일신장(直日神將), 종규(鍾馗), 위지공(尉遲恭), 진숙보(秦叔寶), 위정공((魏鄭公), 닭, 호랑이 등이 그려졌고 송축을 위한 선물용으로 수성(壽星)과 선녀 그림을 비롯하여 길상적 성격을 지닌 인물, 화훼, 누각 등이 그려졌다.

내용 및 특징

현전하는 그림들 가운데 어떤 그림이 세화로 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통해 궁궐에서 제작되었던 세화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1456년(세조 2)에 세화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에 따른 백성의 생활을 그린 사민도(四民圖)가 제작되어 궁궐 각 전각의 벽에 붙이려 하였고(『세조실록』 2년 1월 2일), 1510년(중종 5)에는 세시에 미리 화사(畵師)로 하여금 각기 화초·인물·누각을 그리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중종실록』 5년 9월 29일).

또 조선중기의 정홍명(鄭弘溟)은 『기암집(畸庵集)』권8 「희제세화(戱題歲畵)」에서 신선이 가지를 쥐고 학을 탄 모습, 꽃을 들고 사슴을 탄 신선 등 그림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양주익(梁周翊)은 정조로부터 남극성의 신선을 그린 남극노성도(南極老星圖) 두 폭과 용을 탄 신선 그림 두 폭을 받고 감사의 글을 남기고 있어, 세화로 그려진 신선도의 대체적인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도화서에서 수성, 선녀와 직일신장의 그림을 그려 왕에게 드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밖에 대궐문 양쪽에는 금(金)·갑(甲) 두 장군상을 한 길이 넘는 크기로 그려 붙였고, 중문과 곁대문 등에는 붉은 도포에 검은 사모를 쓴 위정공과 잡귀를 퇴치한 도교의 신 중 하나인 종규가 귀신 잡는 형상으로 붙여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기록에서 확인되는 세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민도를 비롯하여 금갑신장, 직일신장, 인물, 화훼, 영모, 신선도, 선녀, 닭, 호랑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변천

세화 풍속의 시작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아직 밝혀진 바 없으나 ‘세화’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기록으로는 고려말 문신인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2 「세화십장생도찬(歲畵十長生圖讚)」이 있다.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십장생도를 꺼내 보며 장수를 기원하고 성은에 감사하는 내용을 적고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이전부터 세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초기부터 세화에 대한 기록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화 제작이 조선시대 들어 제도적으로 마련된 듯하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승하하자 도화원에 명하여 국상 기간 3년 동안에는 세화 제작을 금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초부터 세화 제작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 8년 11월 2일). 이외에도 1483년(성종 14)에는 왕과 재상들이 상중(喪中)에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역귀를 쫓는 세화축역(歲畵逐疫)을 계속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는 세조 비 정희왕후의 상중이었던 때였으나, 신하들은 상중이라 하여 세화축역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세화 제작이 이미 관례화된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14년 11월 19일).

한편 연산군 집정 시기에는 세화 제작이 상당한 양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1496년(연산군 2) 연산군은 성종의 국상 기간임에도 세화를 지나치게 많이 제작하게 하여, 신하들로부터 원성을 들었다(『연산군일기』 2년 12월 2일). 이후에도 세화의 제작은 계속해서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1510년(중종 5)에는 정언민수천(閔壽千)이 세화의 지나친 제작을 지적하면서 ‘조종조에서는 세화 제작량이 60장을 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20장씩 받아 가지고 석 달을 그리니 그림의 수량을 감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중종실록』 5년 9월 29일). 1537년(중종 32)에 도화서 소속 화원이 20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화원 1인당 20장씩, 모두 400장에 이르는 세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말기의 세화 제작량은 더욱 늘어났는데, 『육전조례(六典條例)』 권6 「예조(禮曹)」 도화서조에 “세화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 각 30장, 본서 화원이 각 20장을 12월 20일에 봉진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천 장 가까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궁중에서는 국상 중에 세화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세화는 매년 정례화되어 제작되었고 많은 양이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궁중의 세화 풍속은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으로 확산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참고문헌

  • 『목은집(牧隱集)』
  • 『기암집(畸庵集)』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연구』, 돌베개, 2001.
  • 김용권, 『민화의 원류 조선시대 세화』, 학연사, 2008.
  • 이정인, 「조선시대의 세화에 대한 연구」,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