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초(洗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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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뒤 남은 사초·시정기·교정지를 잘게 부순 뒤 차일암에서 물에 불려 씻던 절차.

개설

세초는『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여 인출(印出)한 후에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이 창의문 밖 차일암으로 가서 『조선왕조실록』 초본을 비롯하여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교정지 등을 물에 담가 먹의 흔적을 씻어 내어 해당 관아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세초하는 날을 전후로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편찬을 끝으로 효용을 다한 사초를 물에 씻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분명 불에 태웠던 중국 명나라의 경우와 차이가 있는데, 왜 이런 방법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초의 누설을 막고 종이는 재생하려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물로 씻든지 불로 태우든지 이는 어떤 단계의 변화, 즉 죽음이나 이별 또는 승화를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에 씻기는 사초를 바라보는 참여자들의 정서에는 어떤 느낌이 떠올랐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세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세초가 단순히 사초를 처리하기 위한 실무의 의미에 그쳤다면 실록청당상관과 낭청이 서리를 데리고 마무리해도 될 일이었지만, 모든 『조선왕조실록』 편찬자가 참여하였고 이들에게 왕이 내리는 술인 선온(宣醞)을 내려 잔치를 열어 주었다는 것은 그 의례적 집단성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초와 세초연(洗草宴)은 곧 ‘사초의 상례(喪禮)’로, 한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세초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공감하는 예식인 듯하다.

연원 및 변천

세초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로는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전부터 세초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중종실록』 2년 2월 26일). 하지만 대체로 사초 관리 원칙이 정해진 뒤인 『세종실록』 편찬 무렵부터 세초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절차 및 내용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의 간행을 마치면, 길일을 택하여 봉안할 날짜와 세초할 날짜를 정하였다. 세초 전에 미리 해야 할 일은 세초할 기록물을 잘라 놓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공감에서 보계판(補階板)과 전판(剪板)을 가져왔고, 자른 종이를 담을 빈 가마니와 망을 준비했다. 책장(冊匠)과 지장(紙匠)은 각자 종이 자르는 칼을 지니고 대령한 것을 보아 세초 기록물을 자르는 것은 이들이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잘라서 망과 가마니에 담아 놓은 세초 기록은 차일암으로 나갈 때 말에 싣고 붉은 큰 보자기로 덮어 인로군(引路軍)이 인도하여 차일암으로 향했다.

차일암에서 지통(紙桶)에 이들 자료를 넣어 세초를 담당한 이들은 세초군(洗草軍: 세초꾼) 또는 침세군(沈洗軍)이었다. 이들은 세초 당일 조지서(造紙署)에 대령하여 점고를 받았는데, 그 인원은 세초할 기록의 양에 따라 6명에서 40명에 이르렀다. 세초를 마친 휴지를 수거하는 호조 낭청은 당일에 차일암이나 조지서에서 대기하였다.

한지였으므로 세초를 마친 종이의 먹이 다 지워졌을 리는 없지만 아마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 세초한 기록을 휴지라고 하였는데, 휴지는 호조로 수송되었다.

또한 세초하는 날을 전후하여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세초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위해 「세초연절목」을 정해 두었다. 예조는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여러 관서에 나누어 할당하였다. 선온의 규모는 당시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영조실록』을 편찬한 후 1781년(정조 5) 7월 22일에 의정부에서 거행된 선온은 ‘내선온(內宣醞)’이었다. 내선온은 선온을 중사(中使: 내관)가 주관하고, 외선온(外宣醞)은 승지가 담당하였는데, 내선온과 외선온은 찬품(饌品)이 각기 달랐으며, 내선온에 비해 외선온은 소략하였다.

1781년 『영조실록』의 선온은 의정부와 차일암에서 각기 7월 22일과 7월 26일에 거행되었다. 홍문관 제학이명식(李命植)이 선온을 내려 준 정조에게 감사하는 전문(箋文)을 지었으며, 정조에게 전문을 올리는 의례는 세초한 다음 날인 1781년 7월 26일에 거행되었다. 전문을 올리는 의례는 진사전의(進謝箋儀)의 절차에 따라 거행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실록청의궤』에는 세초에 대하여 준비 과정, 절차, 인원, 예식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기초로 세초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초는 현대 기록 관리에서도 ‘물에 불림[maceration]’의 방법과 절차가 있으므로, 비교 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인조대왕실록찬수청의궤(仁祖大王實錄纂修廳儀軌)』
  • 『경종대왕실록산절청등록(景宗大王實錄刪節廳謄錄)』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순종대왕실록청의궤(純宗大王實錄廳儀軌)』
  • 『헌종대왕실록청의궤(憲宗大王實錄廳儀軌)』
  • 『철종대왕실록청의궤(哲宗大王實錄廳儀軌)』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상)』, 민족문화추진회, 2007.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하)』, 민족문화추진회, 2008.
  • 오항녕 역, 『(역주)선조실록수정청의궤』, 일지사, 2004.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신병주, 「‘실록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왕조실록』의 관리 체계」, 『국사관논총』102, 2003.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 오항녕,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상징성과 편찬관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6, 2003.
  • 조계영, 「조선 왕실 봉안 서책의 장황과 보존 연구-『선원계보기략』과 『국조보감』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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