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勢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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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 중에서 왕실과 조정의 정치권력을 좌우하던 가문.

개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흔히 양반으로 지칭된 많은 고려의 엘리트들은 과거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성공적으로 새 왕조 안에 진입했다. 과거는 최소한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매우 폭넓고 한층 강화된 집권적 관료제 안에서 고위직에 이르는 사실상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를 통해서 많은 구(舊)가문들이 권력과 영향력을 지속시켰다. 다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학문적 성취도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가문들은 조선의 지배 세력으로 나아갔고 이 중 일부는 조선후기까지 특권적이면서도 세습적으로 권력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지배 세력을 통칭하여 세가(勢家)라고도 불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지배 계층인 양반은 문인과 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문인의 지위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그들은 과거 시험에 의해서 관료로 선발되었다. 과거 시험은 지배 계층이 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이었다. 또한 양반은 관직은 세습할 수 없었지만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세습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모든 후손들도 그 사회적 지위를 세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반 중 일부는 지속적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아가 지배 계층이 되었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세가 또는 권문세가(權門勢家), 세가거실(勢家巨室)이라고도 불렀다. 조선후기에 들어서서 세도 정치의 주역인 가문을 부를 때 통칭해서 세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세가는 양반 중에 권력이 있는 자들을 일컬었다. 하지만 19세기인 조선후기가 되면 세가란 조선초기와는 다르게 불려진다. 그것은 어린 임금이 잇따라 즉위하는 가운데 국왕의 정국 주도력은 극히 위축되고, 이른바 ‘세도가문’으로 불리는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노론에 속하는 소수의 외척 가문이 정국을 좌우했다. ‘세도(世道)’라는 말은 원래 세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긍정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본래 국왕의 권능이었던 ‘세도’를 지키는 책임을 소수 외척 가문이 장악하면서, 그 의미는 결국 정치권력의 장악이란 의미인 ‘세도(勢道)’로 변질되었다. 이 세도가문들이 세가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미야지마 히로시, 「조선 후기 지배 계층의 재생산 구조: 비교 연구를 위한 초보적 탐구」,『한국사학보』32, 고려사학회, 2008.
  • 미야지마 히로시,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대동문화연구』4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3.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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