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봉대(城隍烽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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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에 위치하며, 함경도 경흥(慶興) 서수라(西水羅) 우암(牛巖)에서 시작되는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속한 봉수.

개설

함경도 영흥부의 덕치(德峙)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서 고원(高原) 웅망산(熊望山)에 전달하기 위해 조선후기에 설치하였다. 성황봉대는 경흥 서수라 우암에서 처음 시작되는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속하여, 최종적으로는 경봉수(京烽燧)인 목멱산(木覓山)봉수 제1봉수에 연결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황봉대는 『여지도서』의 발간을 전후한 18세기 중엽에 신설되어, 조선시대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포함되었다. 『여지도서』에는 성황치봉수(城隍峙烽燧)로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덕치봉수(德峙烽燧)와, 남쪽으로는 고원 웅망산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여지도서』에는 영흥부 서쪽 3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해, 『대동지지』에서는 영흥부 서쪽 5리라고 하였다. 영흥부 서쪽에 자리한 것은 확실하나, 그 거리는 지리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함경도남병사(咸鏡道南兵使)가 성황봉대를 관할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다른 읍지(邑誌)에는 성력산(聖歷山)봉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변천

성황봉대는 1770년(영조 46) 7월에 북병사이방수(李邦綏) 등이 북도의 봉수를 살펴보고 올린 계문(啓聞)을 통해 혁파가 건의된 바 있다. 이방수 등은 성황봉대의 터가 푹 들어간 데가 있으니 혁파하고, 덕치봉으로 하여금 바로 웅망산봉화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영조실록』 46년 7월 9일).

그러나 영조대의 혁파 건의에도 불구하고 성황봉대는 1895년(고종 32)에 갑오개혁에 의해 최종적으로 봉수제가 철폐될 때까지 운용되었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주홍, 『북한의 봉수』, 서경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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