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집요(聖學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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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 1536~1584)가 1575년(선조 8) 제왕의 학문 내용을 정리해 바친 책.

개설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 1536~1584)가 1575년(선조 8) 제왕의 학문 내용을 정리해 바친 책이다. 8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율곡전서』에 실려 있다. 16세기에 사회와 정부를 주도하게 된 사림파는 개인의 수양과 학문이 사회 운영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신유학의 이념을 매우 강조하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군주의 수양과 학문에 대해서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인 교육을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함께, 16세기 후반 사림파의 학문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이이의 교육에 대한 대표적 저술이다.

서지 사항

13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신자본(戊申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6.2cm, 가로 23.4cm이며,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편은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리는 의미를 밝힌 ‘진차(進箚)’와 서문, 통설 등을 실었고, 2~4편은 ‘수기편(修己篇)’으로서, 자기 몸의 수양에 대한 내용을, 5편은 ‘정가편(正家篇)’으로 가문을 바로하는 법을, 6~7편은 ‘위정편(爲政篇)’으로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8편은 학문과 위정의 바른 줄기를 밝힌 성현도통(聖賢道統)을 담았다.

저자는 ‘사서’와 ‘육경’에 담긴 도를 개략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수기ㆍ정가ㆍ위정편은 각기 총론과 여러 개의 각론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 구도는 『대학』을 따른 것으로서, 수기편은 『대학』의 ‘수신(修身)’에, 정가편은 ‘제가(齊家)’에, 위정편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한다. 마지막의 성현도통은 『대학』의 이념이 구현되어온 맥락을 설명하였다.

『성학집요』는 1575년(선조 8년)에 완성되었다. 붕당정치는 이 해부터 시작되었고, 지배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다. 당시 율곡의 관직은 홍문관 부제학이었고, 40세 나이에 붕당의 중심에 있었다. 나이로나 관직으로 볼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율곡이 임금 한 사람만을 독자로 삼은 『성학집요』를 펴낸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은 1564년(명종 19년)에 29세의 나이로 관직에 진출했다. 1565년에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정권을 쥐고 흔들었던 보우와 윤원형에 대한 대대적인 탄핵이 벌어졌다. 『성학집요』의 ‘정가(正家)’편에 외척의 처우에 대해, 길게 다룬 까닭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율곡은 여러 번 있었던 사화(士禍) 등으로 훈구파에 밀려 절치부심하고 있던 사림파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는 때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1567년에 명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선조는 왕실의 방계 출신으로 기존의 정치 세력과 연줄이 없었지만, 총명함 때문에 재목으로 지목되었다. 선조의 등극과 함께 사림파는 비로소 정계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며,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율곡은 사림파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이조좌랑, 언관, 홍문관교리, 제학,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한 경력을 보면,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성학집요』는 직접 왕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흔치 않은 형식의 책인데, 당시의 왕은 선조였으므로, 선조를 위해 지은 책인 셈이다. 그만큼 선조가 좀 더 철두철미하게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책을 지어 올리면서, 함께 바친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보면, 선조의 성격과 장단점을 자세히 지적하고, 개선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위정(爲政)’편에서는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를 구분하고는 가장 어려운 것이 경장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논했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선조의 등극과 사림의 정계 진출로 개혁 행보를 강하게 걸기를 희망했던 율곡은 기대와 달리 기존의 세력이나 관행은 청산되지 못한 채, 개혁을 추진해야 할 주체인 사림파 스스로가 동ㆍ서로 분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그 중심에 있는 임금이 확고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감했다.

율곡은 ‘위정’편에서는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했는데, 인재 등용이야 말로 정치의 향방을 가름 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최종 인사권자인 임금은 직접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적합한 사람을 등용해 맡겨두면 되며,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는 임금이 훌륭한 임금이라고 하였다.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려면 그만한 인격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 임금은 욕심이 적어야 하며, 또 자기주장을 접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성학집요』 뿐만 아니라, 유학에서 거론되는 최고의 왕은, 훌륭한 신하들에 둘러싸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율곡은 선조가 현명한 임금이기를 바랐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개혁이 이루어질 듯한 분위기는 조성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절되곤 했다. 『성학집요』는 이처럼 애매하고 답답한 시기에 진퇴양난의 고뇌를 안고 있던 지은이의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는, 임금에게 남은 희망을 걸고, 학문적 역량을 다 쏟아 부은 역작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이후 경연의 교재로 실제 국왕의 학문에 많이 이용되었지만, 일반 사족(士族)들의 학문에도 매우 중요한 저술이었다. 홍대용(洪大用)이 사회를 운영하는 학문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함께 이 책을 중시한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개혁의 방향을 탐색하는 데도 오랫동안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이 책에 대한 종전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실록의 관련 기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직접 책을 받은 선조가 높이 평가한 것은 물론이고, 숙종 이후부터는 경연(經筵)의 교재로 쓰일 만큼 비중 있는 저술이었다. 왕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성학집요』는 보다 넓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는 학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수신ㆍ제가ㆍ치국평천하’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수기ㆍ치인으로 대치할 수 있고, 왕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또 책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기」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다.

독자들은 조목조목 잘 정리된 이 책을 통해 유학에서 지향하는 제왕과 정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당대 지식층이 어떤 인간상을 추구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지은이가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정치를 지향하며,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고자 했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신창효, 「수기(修己)의 측면에서 본 『대학』에서 『성학집요』로의 학문적 심화」, 『동양고전연구』 제34집, 동양고전학회, 2009.
  • 안외순 역, 『동호문답』, 책세상, 2005.
  • 이정효,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편간과 영향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 이이, 장숙필 역, 『성학집요』, 을유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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