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저십리(城底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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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 도성 밖 10여 리에 해당하는 지역.

개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성부의 백악·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쌓아 도성 밖과 안을 구분하였다. 이때 도성을 기준으로 사방 10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였다. 조선시대 한양의 지리적 공간은 도성과 성저십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한성부 오부(五部)에서 담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성저십리 지역으로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고, 정부에서는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방(坊)을 따로 설치하면서 한성부의 실질적인 업무 영역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저십리는 조선이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도성을 건립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성저십리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량진에 이른다.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지역까지 정확하게 구분했다기보다는 강이나 하천, 그리고 산을 기준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동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홍제천, 남쪽으로는 한강까지의 영역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특별히 정한 것이 없이 북한산 주변을 경계로 삼았다. 이러한 도시의 공간적 구조는 1765년(영조 41)에 도성 주위에 심어진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한 경계 지역을 표시하여 만든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 성저십리 지역에는 면을 두어 한성부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문종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이견기(李堅基)는 한성부의 낭청(郎廳) 6명이 한성 오부와 성저십리 지역을 나누어 순찰하면서 관리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고 관할 지역도 넓어 어려움이 있으니 낭청을 추가로 더 배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문종실록』 1년 10월 12일). 이후 1461년(세조 7)에는 한성부에서 서울 오부 밖의 성저십리는 본래 관장하는 곳이 없어서 권농관(勸農官)이나 마을을 책임지는 이정(里正) 등이 일의 크고 작음이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서 마음대로 한성부에 소장을 올리고 있다고 하면서 성저십리 지역의 민생 관련 업무를 한성부 오부에 소속시켜 오부에서 업무를 관장할 것을 요청하니 세조가 이를 받아들였다(『세조실록』 7년 2월 27일). 결국 이때부터 성저십리 지역의 백성들은 한성부의 직접 관리가 아닌 오부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또한 성저십리에는 권농관과 이정이 있어 실질적인 농업의 장려와 주민 통제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초 성저십리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수가 성안에 미치지 못하였다. 1426년(세종 8)에 조사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으나 성저십리의 인구는 6,044명으로 전체의 5.5%에 불과하였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개경에서 이주해 온 조선의 핵심 세력들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았고, 기존에 한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들에게 밀려 도성 밖 성저십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성 밖의 인구가 늘어났고, 대부분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수도 서울이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성저십리의 인구가 모두 76,782명으로 전체 인구의 40.6%로 증가한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참고문헌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 태학사, 2007.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행정사』, 서울특별시, 1997.
  • 원영환, 『조선시대 한성부연구』, 강원대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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