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암체(雪菴體)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원(元)나라의 승려 설암(雪庵)의 서체.

개설

편액에 쓰이는 한자체를 흔히 액체(額體)라고 하는데,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필획이 방정하고 강건하면서도 글자의 결구(結構)가 긴밀해야 하므로 주로 해서를 많이 사용했다. 원나라 승려 설암의 글씨가 고려말에 들어온 이래 공민왕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의 서법을 수용하였고, 편액의 서체에도 반영되었다. 현재까지도 궁궐은 물론 전국 곳곳에 전하는 사찰, 서원 등의 편액에서 설암체(雪庵體)의 다양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설암은 14세기에 활동한 원나라의 승려이다. 법명은 부광(傅光), 속성은 이씨(李氏), 자는 현휘(玄暉)이며, 호는 설암이다. 그의 대표적인 대자(大字) 해서를 흔히 ‘설암체’로 일컬었으며, 조선의 액서(額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명말청초의 학자 도종의(陶宗儀)는 설암 이부광에 대해 “글씨와 그림은 신품의 경지에 올랐고, 서법은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에서 나왔으며, 해서·행서·초서를 잘 썼다. 큰 글씨는 더욱 잘 썼는데, 조정의 편액은 모두 그의 글씨이다.”라고 하였다. 설암은 당(唐)의 안진경과 유공권, 송(宋)황정견(黃庭堅)의 서체를 배워 독특한 대자 서풍을 이루었다. 그의 대자 해서는 흔히 액체라 불리면서 편액에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말 조맹부(趙孟頫)의 필적과 함께 전래된 뒤 조선초에 이미 『춘종첩(春種帖)』, 『병위삼첩(兵衛森帖)』 등 그의 필적이 국내에서 널리 간행되었다. 세종대에 새로 간행한 『설암법첩(雪菴法帖)』을 종친, 의정부, 육조, 집현전 등의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지만(『세종실록』 13년 6월 2일) 세종의 설암체에 대한 입장은 세간처럼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세종은 설암의 서체를 특별하게 여기고 필요에 따라 쓰긴 하지만, 설암의 진수(眞髓)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법(古法)인 진(晉)나라의 해서를 권유하였다(『세종실록』 17년 4월 8일).

조선초기에 설암체로 뛰어났던 인물로는 암헌(巖軒), 신장(申檣)을 들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장은 대자를 잘 써서 세종이 설암이 쓴 『병위삼화극연침응청향(兵衛森畵戟宴寢凝淸香)』이란 서첩에서 ‘병위삼’ 3글자가 떨어져 나간 것을 신장에게 명하여 보충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의 편액 글씨로 ‘임씨가묘(林氏家廟)’가 남아있다.

그밖에도 공민왕, 이황, 한호, 송시열 등이 설암체로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특히 한호가 쓴 대자 편액은 설암체의 근골(筋骨)이 강하게 나타나는 사례와 짜임이 방정하고 비후(肥厚)한 획법으로 근골을 감싼 2가지로 나뉜다. 근골이 강한 예로 1575년(선조 8)에 쓴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편액이 있고, 짜임이 방정하고 점획이 살찐 예로는 안강 옥산서원의 ‘구인당(求仁堂)’ 편액 등이 있다. 이러한 편액 서풍은 묵적이나 간본으로도 다수 전하는데, 일례로 1600년(선조 33)에 쓴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들 수 있다. 특히 한호의 대자 『천자문(千字文)』은 설암체의 진수를 체득하여 조선화한 것으로, 조선시대 설암체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이완우, 「石峯 韓濩」, 『미술사논단』 12호, 한국미술연구소, 2001.
  • 이완우, 「退溪 李滉의 書藝」, 『退溪 李滉 특별전 특강 논문집』, 예술의전당, 2001.